▲ 2004년도에 발굴한 원당동 구석기유적 모습. /사진제공=인천 원당동유적 보고서 중에서

 

인천에 살았던 인류가 남긴 최초의 흔적, 서구 원당동 구석기 유적

과거에 중·고교를 다녔던 분이라면 학창시절 역사수업의 첫 시간은 '구석기시대'를 배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천에는 구석기유적이 있을까. 2000년 초까지 발굴유적이 없어 확신할 수 없었던 인천의 구석기유적을 서구 원당동에서 처음 찾았다. 이 일대는 2000년을 전후해 인천시 도시개발본부에서 추진하던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에 포함되어 조사하게 되었다. 그 까닭에 원당동에서 인천 최초로 구석기유적이 찾아졌는데,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인천 지역에서 가능성으로만 여겨졌던 구석기시대의 유적을 정식 발굴조사로 확인했다는 점, 둘째, 인천 역사의 상한선이 마침내 구석기시대로 상회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1만년 전 이전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은 주변 환경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식량자원 확보 등 그들의 삶과 밀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시 원당동 일대의 주변 환경은 어땠을까. 지금의 검단선사박물관 일대인데, 유적 주변에는 해발 100m 정도의 높지 않은 만수산, 고산, 묘지산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유적은 구릉 끝부분에 위치한다. 현재 원당동 유적에서 서해안까지는 직선거리로 10㎞, 한강까지는 5㎞인데, 과거에는 해안가나 강가와 훨씬 더 가까웠을 것이다. 따라서 원당동 구석기인은 어로 활동이 쉬웠을 것이며, 주변 구릉성 산지가 많아 채집 및 사냥 활동에도 유리한 조건이었음이 분명하다.

발굴된 99점의 석영계 석기들, 어떤 연모를 만들었을까.

발굴된 석기는 모두 99점이며, 돌감은 흔히 말하는 '차돌'인데 석영계통이다. 이 재료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불순물과 켜(절리)면이 있어 정교한 석기를 만들기 어렵지만 견고하고 날카로운 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널리 사용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의 종류로는 석기를 만들고 남은 몸돌(Core), 몸돌에서 떼어낸 격지(Flake), 돌을 떼어서 공처럼 둥글게 만든 여러면석기(Polyhedron), 부엌-조리용으로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껍질을 긁어내거나 밀어낼 때 쓰는 긁개(Side-scraper)와 밀개(End-scraper), 석기 제작을 위한 망치(Stone-hammer), 그밖에 부스러기(Debris) 등 다양한 도구가 발견되었다. 석기의 용도는 긁개, 밀개 등 부엌조리용이 가장 많았다. 연대는 1~2만년 전으로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한다. 이 사실로 보아 사슴 같은 온순한 짐승을 사냥하면서 먹거리를 마련하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구석기시대의 뼈화석이 없어 동물 파악의 한계는 있지만 더 많은 유적의 발굴조사로 후일을 기다려 볼 뿐이다.

한편, 사업지구 내에서는 구석기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선사시대 유적이 발굴되어 발굴유물의 처리방안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검단선사박물관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에서 유일하게 선사유물을 주제로 전시와 사회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특히 사라질 원당동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해 발굴현장의 토(지)층 단면을 그대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어 실내에서 유적의 생생한 이해를 더 한다. 많은 유적이 있었던 역사적 장소에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류의 기원을 연구했던 루이스 리키가 아프리카 탄자니아 올두바이(Olduvai) 협곡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치 수만년씩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했듯이…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