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바티칸에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해방신학의 선구자였던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당시 조선일보의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는 보프 신부를 직접 만나 해방신학에 대한 배경과 라틴아메리카의 실상을 듣기 위해 바티칸으로 갔다.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가톨릭교회 곳곳에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약자들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하고 이들을 위해 교회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바티칸에서는 이를 통제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보프 신부를 청문회에서 심문한 분은 바티칸 신앙교리성의 라칭거 추기경이었다. 독일 출신 사제로 그후 베네딕토 16세로 교황이 된 라칭거 추기경은 청문회에서 해방신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경계하고 정치성을 내포한 혁명론을 비판했다. 바티칸에서 계속되던 `세기의 청문회'를 취재하기 위해 수백명의 취재진들이 몰려들었고 보프 신부를 단독으로 만나 대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바티칸에서 청문회를 취재하고 있다가 기적 같은 행운을 만났다. 당시 바티칸에 머물고 계시던 장극 신부님을 만나뵙게 되었고 그 분의 주선으로 보프 신부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소박한 사제 복장에 청문회에 불려나온 신부답지 않게 의연한 자세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해방신학을 설명하는 보프 신부를 보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사제와 바티칸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티칸에서 해방신학 청문회를 취재하고 보프 신부를 만난 다음에 본사로 귀임한 후 답동성당에서 처음으로 김병상 신부님을 만났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핵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투쟁적인 분이 아니라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청문회에 섰던 보프 신부 같은 온화하고 차분한 인상이 인상적이었다. 그 후 대표적인 보수성향의 신문에서 근무하면서 진보쪽에 서 있었던 필자를 격려해주시고 이끌어 주셨다. ▶두 해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기 전에는 헬스클럽에서 자주 뵙다가 서구쪽에 있는 마리스텔라 요양원에서 지내시던 신부님을 몇 차례 찾아 뵈면서 건강이 차츰 회복되시는 것 같았으나 영원히 눈을 감고 마셨다. 지난해 말 드디어 교리공부를 시작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주시고 흡족해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게 떠오른다. 수도권의 대표적인 도시로서 민주화의 거센 물결에서 인천이 뒤쳐지지 않고 나름대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병상 몬시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언론인 신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