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노희정

1940 함남 원산생

1960 인천창영초등, 인천중·제물포   고 졸업

1964 서라벌 예대(서양화전공)졸업

1974 미술회관 기획 초대전(이후 초   대전·단체전 100여회)

1977 1회 개인전(이후 개인전 13회)

1984 이형회 창립전, 한국수채화협   회전

1985 한일창조교류회전(한국·일본)

1990 한국미협 인천지부장(~91)

1991 해반·가가갤러리 개관초대전,    한국예총예술문화상 수상

1992 인천일보사 한중작가 초대전   (시민회관), 오늘의 한국미술   전(국립현대미술관)

1994 인천시 문화상 수상

현재.한국수채화협회 이사, 이형회    운영위원, 인천구상작가회 고   문, 인천광역시 미술초대작가    운영위원장.

늘날 인천 미술계는 보수와 비보수, 기성과 신진, 전통과 혁신, 그리고 권내와 권외 등 보이지 않는 대립과 갈등이 미봉되어 있다.

 좁은 시각으로 보면 이런 점은 미술계에 만연한 이전투구의 현상으로 비쳐질 수 있으나 폭넓은 다양성과 생산적 논쟁은 미술판의 질을 한단계 높이는 긍정적 측면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런 현상은 비단 미술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전반에 걸쳐 생산적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인천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전의 질과 양이 현저하게 높고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노희정(盧熙政·59)화백과 같은 선배 미술인들의 노고가 담보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90년대 초 노희정 화백이 한국 미술협회 인천 지부장으로 재임할때(1990~91) 그는 미협을 제도권 미술인들의 아성이라는 기성 미술인들의 권익옹호 단체에서 탈피하여 신진 작가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창작활동을 뒷받침 하는 미협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단체로 거듭나게 했다.

 일단 그는 「현대 미술 초대전」을 만들어(1990) 오늘날 인천 현대 미술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한편, 중단되었던 「한·중 교류전」을 부활시켜 지역화단을 협소한 시각에서 탈피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희정화백의 노고에 의하여 당시 미협을 백안시하던 청년 작가들이 대거 미협에 가입함으로써 미협의 외형적 모양새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희정화백은 194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천으로 이주한 그의 가족은 이곳에서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창영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 제물포고 등 인천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그의 어릴 때 꿈은 육사에 진학해 육군 지휘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의 꿈이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노희정에게는 가장 실현 가능한 목표이기도 했다.

 1, 2차 시험을 무난히 합격한 그는 신체검사에서 피부병 때문에 탈락한다. 인생에서 첫 좌절의 경험은 아직 어린 그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얼마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풍비박산 난 상태에서 일반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었고 노희정은 두문불출 이불속에서 누워만 있었다.

 이때 군대에서 휴가나온 형이 신문하나를 들고 들어와 노희정을 일으켜 앉혔다. 성적 우수자에게 무료로 배우게 해준다는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모집 광고였다. 이미 고등학교시절 홍익대 주최 전국 학생 미술 실기대회에서 특상을 차지한바 있는 노희정이 아니었던가!

 무난히 서라벌 예대 회화과에 특기생으로 입학한 그는 잠재되어 있던 그의 그림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미술학도 시절 그는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원색의 물감으로 화면에 생동감을 주는 풍경 정물화에 관심을 보였고 그는 이런 그림으로 국전에 입선하는 등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노희정의 작업세계는 자연과 주변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새로움을 발견해 가고자 하는 그의 세계관과 연관이 있다. 말하자면 예술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작가로서의 자세 역시 이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그림은 만인이 보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생각이 지나치다보니 어떤 작품은 자칫 상업주의와 결탁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나(이를 테면 80년대 중반기 고도의 감각적 테크닉을 발휘한 일련의 작은 작품들) 13회의 개인전을 치른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놓고 보면 이내 마음이 달라진다. 말하자면 그가 발휘하는 테크닉은 평생 그가 주변과 자연에 대하여 진지하게 탐구하고 연마해 왔던 표현 기법의 총화이자 완결체일 뿐이지 단순한 기술력 과시는 아닌 것이다. 이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기존의 전통회화 양식을 현대적 감각으로 표출해 보려는 실험적 작업을 즐겨 해왔습니다. 요즈음 흔히들 추구하는 추상성이나 이질적 표현기법을 배제하고 평범한 회화의 진리속에서 사실의 재현이 아닌 소재의 진수를 캐보려는 감각적 나의 작업(수채화적 감각의 전개)을 펼치면서 나름대로 구상회화의 다양한 묘미를 터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고 먼 회화의 여정속에서 나는 항상 출발점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최근 칩거하다시피 작업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는 그를 보자면 그의 작품세계가 이제야 절정에 오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얼핏 보기에 평면화되어 있는 그의 그림은 자연스러운 색채 원근법과 적절한 색의 사용 그리고 세부표현에 집착하지 않는 대범함으로 인하여 마치 세잔의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평면화되어 있는 대상의 조형적 변화를 위하여 스크래칭기법을 사용한다든가 무채색조와 원색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작업들은 현대적 감각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노희정화백은 30여년의 작품활동을 늘 인천을 중심으로 전개시켜 왔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의미의 향토화가는 아니다.

 1975년 미술회관 초대전을 비롯하여 1984년 이후 이형회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인천의 후배화가들과 중앙화단과의 연계에 주력해 왔다. 특히 인천의 이름있는 작가들이 개인작업에 집착하느라 후배들을 이끄는데 인색했던 것에 비하여, 그는 「이형회전」, 「한국 수채화 협회전」, 「한국-캐나다 현대 작가전」, 「한·러 현대 작가전」 등에 참여하면서 이들 전람회에 가능성 있는 후배들을 참가시켜 인천 미술의 대외적 인지도를 높이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런 점이 인정되어 한국예총 예술문화상(91), 인천시 문화상(94)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한국수채화협회 이사, 이형회 운영위원, 인천구상작가회 고문, 인천시 미술초대작가 운영위원장 등을 맡고 있으며 「이탈리아 현대미술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움직이는 미술관 초대전」 등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고 있다.

〈이경모·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