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압군 예봉 꺾고 국권침탈 논리 깨뜨리다

 

 

 

 

 

▲ 오두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북쪽 풍덕군(현 북한 개풍군) 일대의 전경.
▲ 일제의 귀순 권유에 대한 심노술 의병장의 거부.(<폭도에 관한 편책> 1908.05.08)
▲ `군함과 수뢰정으로 강화 앞바다에서 폭도토벌에 나섰다'는 기밀보고서에 `풍덕 거주 심노술' 의병장이 나타나 있다.(<폭도에 관한 편책>. 인경비 제350호)

 

광무황제 밀지 받은 박정빈 평산의진서

중대장으로 활약하다 1908년 독자행보

 

황해도 평산군 도평산 근거지 삼아 투쟁

일본군 진압 실패하자 보낸 `귀순' 권유서

융희황제 해산 조칙·일제 `보호'론 논파

을사늑약 폐기·`자주독립' 결의 드러내

 

의병활동 왕성했던 경기도 풍덕에 거주

강화 및 인근 도서지역까지 진출하기도

 

 

 

◆ 박정빈 의진에서 의병활동 시작

심노술(沈魯述)은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이라고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의 비밀기록에는 풍덕(豊德)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과 연안군 방동면(方洞面) 출신이라는 것도 있다.

그는 1907년에는 박정빈(朴正彬) 의진의 중대장으로 황해도 배천·연안·평산·해주 등지에서 활약하였고, 1908년에는 김용기(金龍基) 의진의 부장(副將)으로, 혹은 독자적인 의진을 이끌고 임진강 유역과 강화도를 비롯한 도서지방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박기섭(朴箕燮:박정빈의 이명-필자 주)은 군대해산 직후에 황해도 유림계 인사들의 추대로 거의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박기섭 의진은 황해도 평산에 근거지를 두고 각 지방에 격문을 돌려 4천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부대편성을 마쳤는데, 이때 심노술은 김정환(金正煥)·한정만(韓貞萬)·인두정(印斗鼎)·변승준(邊承準)·신도희(申道熙)·신성보(愼成甫) 등과 함께 중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심노술은 박기섭 의진의 중대장으로서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황해도 해주·연안·평산 등지와 연해의 여러 도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순사주재소 및 출장소를 공격하는 등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 28쪽)

 

평산의진을 이끈 박정빈은 황해도 수안 출신으로 문과 급제 후 내무아문 주사, 청산현감을 거쳐 1895년에 청주군수, 1899년 친위대 참위, 1904년 목천군수를 지낸 유인석(柳麟錫) 문인이었다. 그가 평산의진을 이끌게 된 것은 군대해산 직후 전 군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전 연안군수 명범석(明範錫)과 전 중화군수 신종균(申從均)으로 하여금 그에게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라는 광무황제의 밀지(密旨)를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평산과 해주 등지의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모여 거의를 위한 논의 끝에 박정빈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격문을 돌리자, 1907년 9월에 4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는데, 일반적으로 평산의진이라고 하지만 황해도 중남부 지역의 의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의진이었다.

평산의진은 여느 의진처럼 의병대장이 직접 의병을 이끌고 산야를 누비면서 의병투쟁을 벌이던 경우와는 달리 선봉부대, 5~7개 중대, 돌격부대, 마산부대로 나누어 실제 의병투쟁은 중대장과 돌격장, 마산 도총장 중심으로 운용되었고, 이들 부대가 연합작전을 전개할 때는 선봉장 이진룡(李鎭龍)이 부대를 총괄하는 대대장으로, 심노술은 김정안(金正安)·한정만(韓貞萬) 등과 함께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박정빈은 1907년 겨울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전개된 13도창의대진의 교남의병대장(嶠南義兵大將)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여 영남지역 의병을 이끌기도 하였다.

 

◆ 강춘삼·이근수 의진 등과 연계하여 의병투쟁

1908년 1월28일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이 중단된 후 다시 황해도 지역으로 돌아와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평산의진의 대장 박정빈이 유인석 의병장과 함께 연해주로 향하게 되자 평산의진은 이진룡 의병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심노술·김정안·한정만 등 중대장은 종전에 비해 독자적인 성격의 의진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강춘삼(姜春三) 의진과 더불어 연안·평산·해주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인 것이 일제의 기록에 드러나고 있다.

 

“적도(賊徒:의병-필자 주) 봉기 이후 한때는 그 수가 6~7백 명에 달하여 여러 개의 부대로 분리되어, 우 판관(禹判官:평산 판관 출신 우병렬-필자 주)이 은밀히 전체를 지휘하고 있었고, 더욱이 신경칠(辛景七)은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해주·강령 기타의 여러 군을 돌아다녔고, 심노술(沈魯術)과 강춘삼(姜春三)은 해주·연안·평산의 여러 군과 연해(沿海) 여러 섬에 출몰하였으며, 이야천(李野天)은 재령군에, 김상현(金相鉉)은 신천군에, 한경옥(韓京玉)과 허덕천(許德天)은 옹진군에, 기타의 소집단은 각지에 출몰하여 주재소·출장소의 순사 및 수비병을 습격하는 등 한때 창궐을 극하였으나, 수색·토벌이 진척됨에 따라 혹은 토벌되고, 혹은 귀순하고, 혹은 도주하는 등 근래에 와서는 일부 방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진정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심노술·강춘삼은 아직도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평산군 서쪽, 해주군 사이의 바다와 육지를, 장명서(長明瑞)의 일파는 해주군 서부지방에 출몰하고 있으므로 목하 수비대와 협력하여 수색에 전념하고 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권. 625~626쪽)

 

심노술 의진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인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드러나고 있다.

 

“경기와 해서지방에는 의병이 치열하여 양주는 황재호(黃在浩), 광주는 김춘호(金春浩), 삭녕은 연기호(延基浩:연기우 이명-필자 주), 파주는 이인순(李仁順:윤인순의 오기-필자 주), 평산은 이진룡, 연안은 심노술·이근수(李根洙) 등이 있었다. 그들의 수는 1천명 내지 1백명으로 수효가 같지 않고 혹은 10명도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살 수가 없었고, 일본인들도 매우 괴롭게 여겼다.” (황현, <매천야록> 6권. 1908)

 

심노술 의진은 연안에서 이근수 의진과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근수는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온정원·연안·청단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연평도에 본거지를 두고 도서지방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해주수비대 공격으로 전사한 의병장이다.

 

◆ 일제의 귀순공작, 논리적으로 반박하다

심노술 의진이 황해도 평산군 도평산(桃坪山)에 본거지를 두고 맹렬하게 의병투쟁을 전개하자 일본군은 수비대와 헌병대를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를 거듭하였다. 마침내 해주경찰서장은 심노술 의병장에게 귀순 권유서를 발송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그는 논리적으로 반박하였다.

 

“… 을미년의 변은 천고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받았고, 신조약(新條約:을사늑약-필자 주)의 체결에 이르러서는 간사함을 품고서 의사·충량을 죽이고, 철도 기타를 점령하고, 산림천택을 강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노예로 삼았다. 귀하의 이른바 보호라는 말은 참으로 이에 있는가? … 만약 그 성유(聖諭:융희황제의 의병해산 조칙-필자 주)와 같음이 원래부터 폐하의 마음이 아니라 만약 조약을 폐기하고 세계열강에 자주 독립을 선언한다면, 황제 폐하의 명령이 내리는 날 감격하여 즉시 덕화(德化:황제 폐하가 덕을 베풂-필자 주)의 말에 복종하였을 것이다. 불복종함에 있어서는 천토만벌(千討萬伐:수많은 의병 토벌-필자 주)을 당해 인류가 다함에 이르러도 나라를 위한 마음을 멸할 수 없을 것이다. (후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권. 145~146쪽)

 

◆ 강화도 지역에서 활약하다

일제는 1908년 8월14일부터 18일까지 군함과 수뢰정을 동원하여 강화도 아래의 풍도(豊島)에서 장봉도(長峯島)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인 후 이어 19일부터 26일까지 강화도를 수색하며, 적극적으로 의병 진압에 나서게 되자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피체되는 의병이 생겨나게 되어 강화도 지역의 의진과 의병장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김용기 의병장 편'에 전술한 바 있다.

 

“노획한 적선에 승조하고 있던 뱃사공 2명을 취조한 바, 적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는 전 육군 기병(騎兵) 부교(副校)였던 경성 사람으로서 김봉기(金鳳基)라고 칭하며, 키가 작고 용모는 고상한 인물로서 부장(副將)은 풍덕군 거주 심노술(沈魯述), 1명은 주소 등 불명인 지(池:지홍윤-필자 주) 아무개라는 자로 적의 세력은 70~90명에 불과하나 전연 해적이 아닌 자로 진술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권. 508쪽)

 

일제의 기록에는 심노술 의병장이 경기도 풍덕에 거주한 것으로 나와 있다. 풍덕은 경기도 개성·장단·통진을 이웃으로 한 군이었는데, 현재는 개성 일부와 합쳐 개풍군이 된 지역으로 1908년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임진강 유역과 강화도·교동도·장봉도 등 도서지방과 함께 의병들의 활약이 매우 많았던 지역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경기의병이 강화에 모이니, 무릇 7천 명이었는데, 왜병과 일진회원 피살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기록한 것처럼 그가 강화도를 비롯한 도서지역까지 진출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