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상 몬시뇰 ‘선종’
‘행동하는 양심’…천주교 사회참여운동 1세대
인천을 대표하는 민주화운동가의 고된 여정

천주교 사회참여운동 1세대이자 인천을 대표하는 민주화 운동의 대부 김병상 몬시뇰이 25일 0시 5분 선종했다. 향년 88살.

몬시뇰은 가톨릭에서 주교품을 받지 않은 명예 고위 원로 사목을 일컫는 말이다.

김 몬시뇰은 지난 2006년 11월 38년 간의 사목 일선에서 은퇴한 후 사회선교 활동을 계속해 왔으나 2018년 3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요양시설에 머물러왔다.

고인은 1932년 충남 공주 교우촌 요골공소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순교자들 이야기를 듣고 자라다 16살에 서울 용산 소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의 길을 준비했다. 하지만 6?25전쟁 때 폐결핵에 걸려 1953년 7월 신학교를 중도 하차했다. 1961년 홍익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963년 서울가톨릭신학대에 입학해 1969년 12월, 38살 늦깎이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몬시뇰은 1974년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유신독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면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되자 창립멤버로 참여하며 민주화 운동을 본격 시작했다. 박정희 유신 체제가 한창이던 1977년 인천교구 총대리 겸 부교구장으로 답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철폐’, ‘언론자유 보장’ 등을 적은 현수막을 내걸고 특별 기도회를 열었다가 투옥됐다. 당시 수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석방 촉구 기도회를 열고, 동창 신부들이 단식농성을 벌인 끝에 보름 만에 석방되기도 했다.

이후 고인은 함세웅 신부, 김승훈 신부 등과 함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이끌었고, 1976~1980년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대책위원장을 거쳐 굴업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모임 상임대표를 맡아 핵폐기장 백지화를 이끌어냈다. 정의구현사제단 공동대표(1989~1995년) 당시엔 인천지역 지식인 40여 명과 공동으로 목요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으로서 인천의 시민운동을 이끌었다.

실업극복국민운동 인천본부 상임대표, 인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학교법인 인천가톨릭학원 이사장 대리 등을 역임했다.

고인은 사회의 정의구현뿐 아니라 만수동성당에서 신자 교육을 통해 새로운 신자를 늘려나가는 이른바 ‘새로운 양 찾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사회 정의’에 투신하며 앞장섰다고 후방에 있었던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며 “뒤에서 욕해 가면서도 지켜주고 후원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앞에 선 사람들이 민주화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8년 12월 인천 국제성모병원 마리아홀에서 고인과 인연을 맺어온 인천교구 사제와 평신도들로 구성된 모임 ‘김병상과 함께(대표 김일회 신부)’가 요양 중이던 그를 위한 회고록 ‘따뜻한 동행’ 헌정미사 및 출판기념회를 열었고, 그는 이 자리에 휠체어를 타고 직접 참석해 미리 준비해간 기도문을 끝까지 낭독해 300여 명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분향소는 인천시 동구 박문로 1 인천교구청 보니파시오 대강당, 장례미사는 27일 오전 10시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봉헌된다. 장지는 인천시 서구 백석동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 032-564-4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