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 국어 교육의 공부 갈래는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네 부문으로 나뉜다. 말하기와 쓰기가 화자(話者)나 필자의 개인적 표현력을 배양하려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듣기와 읽기는 이해력을 신장시키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 네 부문의 조화로운 상호 교섭이 이뤄질 때라야 비로소 양자 사이에는 `의사소통'의 징검다리가 놓이게 된다.
전통적으로 징검다리 이쪽, 저쪽에 화자와 청자가 있어야 하는 말하기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아왔지만, IT기술과 음성 기기의 발달로 이 한계는 오래 전에 무너졌다. 시공을 순식간에 넘어 지구의 반대편에서 음성언어는 문자로, 문자언어는 음성으로 즉시 변환시키는 초현실적 소통의 시대가 온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언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같이 시공적 제약을 뛰어넘었다고 해서 화자와 청자, 필자와 독자 사이에 원만한 소통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김소월의 시 `산유화' 한 편을 읽는다 해도 읽는 이의 이해도는 천차만별인 것이다. 독자 개인의 환경과 소양에 따라 그가 받아들이는 `산유화'의 의미의 총량과 감성의 빛깔은 놀랍게도 그 무게와 색채가 다 다른 것이다.
시(詩)는 오히려 그러한 다의성으로 해서 독자 개개인에게 새롭게 태어나게 되며 그때 구사하는 `모호성'이야말로 시의 지평을 풍부하게 한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적 언어 용법에 국한된다. 누가 일상생활에서 늘 수사적 갑옷을 걸치고 다의적으로 말한다면 돈키호테 취급 받기가 십상일 터이다.
그렇다고 지시어, 개념어를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생활이 생각처럼 용이한 것도 아니다. 표준어와 문법적 지식을 원활하게 활용할 줄 안다 해도 소통은 그리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어른이 초등학교 1학년생에게 “다음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임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그 말은 의사전달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과시한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 된다.
말을 했다고 해서 다 말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학교 단계의 수학적 배경지식이 없는 초등 1년생에게 `내각(內角), 합(合), 증명(證明)'이란 각각의 단어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 음성에 불과한 것이다. 왕년에 사르트르가 말했다는 “실존은 존재에 선행한다.”는 명제 역시 그를 이해하려면 실존주의에 관한 상당한 독서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문학적 언어든, 일상어든 소통은 쉽지가 않다. 더구나 그것이 정치적 적자생존의 투쟁 단계에 이르면 더 그렇다. 말로는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요, 생존의 기본은 협동이니 여야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면서도 그들은 의제를 선점하기 위해 언어적 장벽을 높이 쌓는다. 그 정파들이 훗날 협동체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모든 사회생활, 그 중에서도 특히 정치는 언어로써 하는 것임에도 일부 정치인들이 언어의 기초적인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민적인 불행이다. 그로 인해 일어난 단절과 충돌의 책임은 모두 그 화자, 그 청자에게 있다. 그 같은 총체적 이해 부족은 아무래도 국민적 국어 공부의 부실, 독서량의 부족과 그 누적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는 초중고 국어 교육과정의 하나만이 아니라 크게는 인류, 좁게는 국민이 함께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증진시키는 방법이자 공동체의 생존 토대이다.
그런데도 단어의 75% 이상이 한자어임에도 `한자' 교육을 경시하고, 조기 영어 교육에 입시형 반짝 논술에만 매달린 국어 교육의 부실 결과가 정치에도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말의 잔치가 끝난 허전한 마당에 서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사어(死語)'와 `졸문구(拙文句)' 들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가 저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구나 하는 자괴감을 갖게 된다. 과연 우리는 이 말들을 서로 어떻게 해석해 받아들여 왔는가? 단 한 마디라도 뜨겁게 감동를 주었던가? 내 등에 와 꽂힌 적의의 화살이었던가? 여기서 형해(形骸)만 남은 몰골사나운 사어와 졸문구들을 재인용할 일은 없다. 앞으로는 최소한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와 은유, 직유, 의인, 풍자 등 수사법을 익힌 이들이 정치 일선에 나섰으면 한다. 이를 갈며 서로 헐뜯을 게 아니라 풍부한 어휘력에 위트와 유머까지 구사하는 품격 있고, 감동 주는 명쾌한 유세를 듣고 싶다. 과분한 요구일까?

 

주필 조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