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재진공 꾀하다 형장의 이슬이 되다

◆ 강화도 지역으로 진출하다
1908년 10월 상순, 13도창의대진 안무장(安撫將)과 이인영 총대장의 직할대 총도독(總都督)을 맡았던 김수민이 13도창의대진 대대장이었던 연기우와 함께 의진을 이끌고 강화로 와서 이능권 의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게 되자 일제는 용산에 있는 일본군 보병 제13연대 1소대 30명을 강화도에 증파했는데, 이때 전등사에서 일본군과 1주야에 걸쳐 격전을 벌여 치명적인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하여 ‘이능권 의병장 편’에 전술한 바 있다.
그해 11월에 들어서면서 김수민은 김인성(金寅聖)을 부장(副將)으로, 신광삼(申光三)을 대장(隊長)으로 삼고, 장단군 대남면에서 박종한(朴宗漢)・연기우 의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고, 12월 들어 그 세력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1909년 1월 경기・황해도 지역에서 활약하던 주요 의진은 이은찬(李殷瓚)의 창의원수부(倡義元帥府), 김수민의 창의도독부(倡義都督府), 연기우의 창의존양군수부(倡義尊壤軍帥府) 등이었는데, 이 의진들은 서로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달 20일 일본군 헌병대의 조사 내용을 보면, 당시 경기도 동북부 지역 의병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헌기(憲機) 제114호
최근 폭도의 행동 구역 및 수령의 이름 등은 다음과 같다고 함. 
윤인순(尹仁淳)・김인성(金寅聖)・정용대(鄭容大)・김교승(金敎升) 4명은 그 부하 합쳐서 약 300명을 이끌고 양주, 포천군 지방을 배회하고 있다고 함. 
김수민(준수俊洙)은 부하 약 200명을 이끌고 장단, 파주군 지방을 횡행하고 있다고 함. 
이은찬・연기우・황재호(黃在浩)는 각기 약 100명 정도의 무리를 이끌고 양주, 포천, 적성군 지방을 배회하고 있다고 함. 
박종한(朴宗漢)은 약 100명을 이끌고 마전군 지방에서 행동하고 있다고 함.” (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10권, ‘경기도 내의 폭도 활동지역 및 수령 명단 조사 보고’)

김수민 의진은 200여 명이었지만 실제 행동은 소규모로 나누어 장단, 토산, 안협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면서 ‘창의도독부사령장 겸 군량관 김’, ‘소모관 김’ 등의 이름으로 군자금을 징발하였으며, 풍덕군 황매동(黃梅洞)을 출발하여 강화도에서 활약하던 의진과 합진하여 강화, 풍덕, 통진, 김포 사이를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3월 14일 폭도 수령 김수민은 100여 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강화도로 향하여 풍덕군을 출발하였는데, 해적(海賊:도서지방에서 활약한 의병-필자 주) 권(權) 아무개와 회합하고 있다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516쪽)

◆ 과감한 서울 잠입과 서울진공 모색하다
1909년 3월 강화도에서 군자금을 징발한 김수민은 3월20일경 서울에 잠입하여 이화령(梨花寧) 앞에 거주하면서 단발총 60정을 비롯한 다수의 군수품을 구입한 뒤 서울을 빠져 나와 적성군에서 활약하던 연기우 의진에 단발총 40정을 주었다. 김수민은 동생이자 선봉장이었던 김백수(金白洙)에게 의진을 맡기고 다시 서울 제동(齊洞)에 잠입하여 인력거꾼으로 위장하고 적정(敵情)을 살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경성구세군(京城救世軍)에도 가입하였다는 것이 일본군 제6사단 참모장 사토 가네다케(佐藤兼毅)가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에게 보낸 문서 ‘제6사단사령부참수발 제398호’(1909.06.01)에 나타나 있다. 

“금화수비대장의 정찰한 결과에 의하면, 
1. 수괴 김수민은 부하를 고참자에게 부탁하고 자신은 경성구세군에 가입한 것 같다.
2. 연기우는 김수민과 의형제를 맺고 최근 경성으로부터 단발총 60정을 구입, 연기우는 그 중 40정을 수령한 것 같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권. 518쪽)

김수민은 연기우와 연합하여 근거지를 적성군으로 옮겨 그곳의 부호들을 상대로 돈과 곡식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총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보다 적극적이었던 것은 13도창의대진이 실패했던 서울진공을 재시도하여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김수민의 서울 잠입은 일제에 의해 포착되었다. 일본군은 이전에 서울에 잠입했던 그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어서 서울 곳곳에 밀정을 통하여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 군경은 변장대를 운용하여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자 그는 경기도 고양군 하도면 화전리(花田里)로 피신하였다가 1909년 8월14일 피체되기에 이르렀다.
김수민에 대한 신문 내용이 경기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비밀문서 ‘경경비수(京警秘收) 제1580호의 5’(1909.11.20)에 드러나 있다. 

“김(金)이 거의할 당시는 30명의 부하를 갖고 재작년 말에 이르러 약 300명이 되어 이어 일본병에게 토벌되었으므로 흩어져 겨우 부하 1명만이 남은 일이 있었다. 작년 봄에 다시 5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기에 이르렀으나 질병으로 군기(軍氣)가 부진하였고, 그리고 그가 가장 존숭(尊崇)한 것은 이인영(李麟榮)으로 그는 이(李)로부터 ‘지방안무’라는 칭호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9권. 649~650쪽)

◆ 일제통감부 통감, 사형집행 명령하다
일제는 김수민 의병장에게 이른바 내란죄를 물어 교수형을 선고하고,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는 사형집행을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기밀 통발(統發) 제2043호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 무직
내란범 김수민. 43세
우(右) 자는 명치 40년 음력 8월에 의병이라 칭하는 도당(徒黨)의 모집에 착수하여 9월에 이르러 그 인원이 약 300명을 달성하였음으로써 이를 이끌고 스스로 수괴(首魁)가 되어 동월 중에 경기도 개성군 대흥산의 창고 내에 저장한 한국 정부 소유의 대포(大砲) 30문, 소포(小砲) 150문을 약탈하고, 동 10월 11일 밤 장단군 북면에서 일본병과 교전하고, 동 12월에 부하 병사 약 100명을 통솔하고 피고와 동일한 목적으로써 행동한 이인영(李麟榮)의 부대에 합병하여 그들과 함께 경기도 장단, 마전 등 각 군을 횡행하여 본년 음력 2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수차례 일본병과 교전하여 난(亂)을 일으킨 소위에 대하여 형법대전 제195조에 의하여 본년 10월 14일에 경성지방재판소에서 피고를 교(絞)에 처하는 바의 판결을 한지라. 피고가 공소를 하였으나 본년 11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공소를 기각하여 판결이 확정되었음으로써 본일 경성공소원 검사장 세코 스케지로(世古祐次郞)에게 판결과 같이 집행할 사(事)를 명하였기에 우를 통지함.
명치 42년 12월 11일
통감 자작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태자소사(太子少師)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각하” (이태룡 역주, <통감부래안(統監府來案)>. 22쪽)

1909년 11월부터 일제통감부 통감은 대한의 융희황제의 재가없이 의병장에 대한 사형집행을 명령하였던 것이니, 그는 1909년 12월 11일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의 명에 따라 경성감(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 전신)에서 순국하게 되니, 그해 12월17일이었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2017년 8월)로 선정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