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19일 서울에서 가장 먼저 혁명이 시작됐다.
앞선 3월15일 치러졌던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행방불명된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독재에 저항해 민주주의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4·19 혁명이 올해로 60년을 맞았다.
60년 전 이날의 분노는 전국으로 이어졌었다. 부산과 광주에 이어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 등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특히 인천 역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일어났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뿐 아니라 교복을 입은 중·초등학생까지 수 백 명이 거리로 쏟아졌다.
4·19혁명으로 전국에서 115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부상당했지만 다행히 인천에서는 사상자가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인천기계공고를 포함한 인천고, 인천여고, 제물포고 등의 학생들은 '평화적', '무저항' 시위를 원칙으로 조용하지만 강력한 의지를 전달했다. 이승만이 설립한 인하공대 마저도 대열에 합류했다.
이때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담은 희귀한 사진 자료를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을 통해 입수해 싣는다.
▶관련 화보 15면
당시 경기도경찰국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들 사진 너머 대한민국 민주화 열망에 당당히 동참한 인천시민들의 피 끓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오경종 인천민주화운동센터장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한 인천 운동은 어린 학생들에게서 비롯됐다는 의미가 크다"며 "곧은 세상을 세우겠다는 중·고등학생들의 결연한 분투가 지금 인천 민주화의 초석이 됐다"고 말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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