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여고 학생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인천시청 현판이 또렷하게 보인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인천여고 학생 대표가 성명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인천시청 앞 광장에 모여든 중학생 시위대.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민주당 인천시당 을구 당부 앞에서 당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법경찰과 정보경찰들. '매란다방'(애관극장 건너편)도 볼 수 있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경동사거리에서 '카빈총'을 메고 경비를 서고 있는 경찰의 모습. 당시 경기도경찰국은 시위대가 파출소에 돌을 던져도 특별한 제재를 하지 않고 질서정연한 시위만 강조했다.(당시 기호일보 1960년 4월23일자 기사 참조)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학생 시위대가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인천시청으로 진출하려다가 중구 관동대로에 연좌 중인 인하대 학생 시위대. 뒤로 멀리 인천중산중학교가 보인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백양사 양복점 싸리재 '백양텔러' 앞을 지나고 있는 경찰차.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인천시청을 찾은 제물포고 학생들. 4·19 순국 학도를 애도한다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 트럭을 타고 경비를 돌고 있는 경찰관들. 경찰차가 주차돼 있는 경찰서 뒤로 멀리 답동성당이 보인다. /사진제공=조우성 인천일보 주필


1960년 4월21일, 인천에서 4.19혁명을 잇는 항쟁이 시작됐다. 데모는 하루 만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사흘 이상 이어졌다.

당시 인천의 중심가였던 중구 싸리재, 답동광장, 내동 거리를 비롯해 동인천역, 중앙동 일대에서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횃불을 들었다.

학생들은 전국에서 연행된 이들의 석방과 정부통령 선거의 재선거를 요구하는 가두 행진과 연좌시위를 벌인 뒤 각 학교 대표들이 인천시청사 앞에서 잇따라 선언문을 낭독했다.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

다음은 제물포고등학교 학생 대표가 발표한 선언문 전문이다.

"먼저 피를 흘리고 쓰러져간 학도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700제물포고등학교 학도들은 현재 전국에서 야기된 불평과 슬픔과 과오를 시정하려고 평화적이요 무저항적인 데모를 감행하려고 합니다. 마산에서 두 차례에 걸친 민족의 의거가 발생하였으며 주권을 가진 국민들은 경찰에 의하여 무참히도 죽어갔읍니다.
나와 같은 피를 타고난 혈족이, 심지어는 심한 고문 끝에 쓰러진 나의 형제가 물속에 던져졌읍니다.
아아 정의감에 불타는 학도들이 이이상 더 참을 수가 있겠읍니까. 서울에서의 평화적 데모로 일부 몰지각한 '깡패'들에 의하며 불상사를 비쳤읍니다. 국민권리의 회수를 요구하는 젊은 청년학도들과 시민들이 경관들의 무차별한 기관총 난사에 고귀한 피를 흘렸읍니다.
아아 이래도 우리는 더 참을 수 있겠읍니까. 안됩니다. 그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찾아야 하겠읍니다."



관련기사
역사를 바로잡은 소년들의 항거…그날을 꺼내다 1960년 4월19일 서울에서 가장 먼저 혁명이 시작됐다.앞선 3월15일 치러졌던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재선거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행방불명된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사건이 결정적이었다.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독재에 저항해 민주주의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4·19 혁명이 올해로 60년을 맞았다.60년 전 이날의 분노는 전국으로 이어졌었다. 부산과 광주에 이어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 등에서 들불처럼 번졌다.특히 인천 역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일어났다. 대학생과 고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