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1987년 체제' 이전, 총선은 대체로 추운 계절에 치려졌다. 1985년 2월의 제12대 총선도 그랬다. 추운 날씨에도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들이 서울 종로에 출마한 이민우 신민당 총재의 유세장에 운집했다. 정치 규제에 묶인 YS를 대신해 손명순 여사가 잠시 이 곳을 들렀다. 이튿날 신문에 실린 이 한장의 사진이 '이민우 돌풍'을 몰고왔다. 창당 한달이 채 안된 신생당을 제1야당으로 끌어올린 추운 겨울의 '뜨거운 바람'이었다.

▶이 후 1988년부터는 4월 총선으로 굳어졌다. 벚꽃이 피거나 지는 계절이다. 그래도 이번만큼 '벚꽃 총선'이라는 말이 실감나지는 않았다. 올해 벚꽃은 유난히 더 일찍, 더 활짝 폈다. 코로나19로 벚꽃조차 외면해야 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쿠라' 선거같은 느낌이어선가. 그래선지 선거 풍경도 사뭇 별나다. "국민들은 알 필요 없다" 던 선거법은 과연 여러모로 엽기적이다. 비닐장갑을 낀 채 두루마리 휴지같은 비례투표용지를 처리하기도 간단치 않다. 지난 주말 쉴새 없이 울려대던 후보자들의 음성녹음 전화는 '070' 대출 광고를 무색케 했다. 그런데 왜 강원도나 부산의 후보들이 수도권 유권자의 폰을 울려대는가. 유권자들은 자기 세금으로 비용이 지불될 선거 전화를 거절하느라 하루가 바빴다.

▶이달 초, 4컷짜리 신문만평 하나가 눈길을 모았다. 여·야 할 것 없이 코로나19 대책으로 '세금 뿌리기' 경쟁에 돌입했던 즈음이다. 만평을 글로 옮기면 이렇다. '옛날 막걸리·고무신 선거 … 자기 돈으로, 요즘 현금 뿌리기 선거 … 국민 돈으로' 막걸리 선거 시절의 유명한 신문만화도 떠오른다. 허기에 지쳐 유세장 공짜 막걸리에 취해 비틀거리던 소년의 표정. 공약들을 보면 GTX나 KTX도 몸살이 나게 됐다. 저마다 지역구에 이들 역을 끌어오겠다고 난리다. 그것도 국민들 돈으로. 이러다가 광역급행 철도도, 고속철도도 무궁화호가 될 판이다. 4거리 현수막의 '18세 이상 월 150만원 지급' 공약이 더 이상 허황돼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확진자에는 1억원을 준다니, 나부터도 마구 돌아다니지 않을까.

▶'막걸리 한잔'이라는 노래가 인기다. 막걸리 마시느라 어머니 고생시키던 아버지를 원망한 것을 후회하는 노래다. 훗날의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우리도 마음을 가다듬고 투표소로 나가야 할 것이다.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알렉시스 토크빌)' '선출된 자는 선출한 이들의 수준을 대변한다.' 그러나 투표함을 깨고 나면 그냥 겸허히 받아들일 일이다. '만사는 나뉘어 정해져 있으니 부생(浮生)이 헛되이 분주해 본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명심보감)'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