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은 임금이 대궐 뜰에서 신하들의 신년 하례를 받고 또 황제가 있는 중국을 바라보며 새해 인사 망궐례(望闕禮)를 올린다. 이 의식은 조선에서만 행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천하에 속한 약소국들이 사대(事大)의 예(禮)로 행하던 중화질서(中華秩序) 중 하나였다.

그러나 중국 대륙이 이적(夷狄)에게 점령당하는 순간 중화질서는 이적의 질서로 대체되었지만, 머지않아 이적의 제국은 다시 중화질서를 재건했다. 그들은 중화전통의 계승자를 자임했고 중화문화를 적극 보전하고 중화제국의 통치방식을 계승해 한인(漢人) 관료를 대거 등용하는 한편 스스로 중국 고성왕(古聖王)의 후예임을 선전하기도 했다.

중화질서의 천하관에서 중국의 천자(天子)는 이념상 중원의 군주에만 머무를 수 없는 존재였다. 이것은 천자권력의 정통성이 천명(天命)의 유무에 있다는 천명사상 때문인데 근세 초기에 절대군주제를 옹호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과 같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 때부터 신성시되어온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의식을 가졌다. 6국을 통일한 진시황도 자신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BC219년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하늘로부터 천하를 받는 의식을 치렀다. 황제는 이 의식을 통해 "모든 하늘 아래 황제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모든 땅 위에 황제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천명을 받는다. 하늘과 하늘의 아들이 천하를 주고받는 순간엔 측근 신하들도 다 물리고 오직 둘 만의 약속이며 공간이 된다. 이것은 허구이지만 누구도 보지 못한 신비스러운 공간이기 때문에 더욱 신성시되고 힘이 있는 태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주장하는 대로 전설의 나라 하(夏)왕조가 BC2070년에 개국하여 천명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해 현대까지 중국이 4000년 역사를 지속해왔다고 하더라도, 서진(西晉, 265~307) 이후 수(隨, 581~619)의 통일까지 약 250년, 요(遼, 916~1125)에서 금(金, 1115~1234), 원(元, 1271~1368)까지 약 400년 그리고 청(淸, 1615~1912)이 멸망하기까지 약 360년을 합치면 대략 천 년의 세월 동안 중국은 한족이 아니라 사이(四夷) 오랑캐들이 통치했다.

예(禮)의 유무에 따라 이적도 중화가 될 수 있다는 논리로 보면 오랑캐 왕조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중화를 자처했던 것은 중국 문화의 선진성과 세련미에 대한 동경, 깊은 역사에 압도당한 측면도 있었지만, 인구가 많고 토지가 광대하고 물산이 풍부한 중국 사회를 통치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소수민족이 일시적으로 힘을 키워 큰 나라를 집어삼켰으나 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중화 전통을 받아들이는 순간 결국 점령자들이 잡아먹히고 말았다.

우리는 중화제국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그 시작은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이라는 외교형식이었다. 이 제도의 기본 전제는 작은 나라의 군왕은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事大)를 하고 천자는 작은 나라를 자식처럼 돌보는 자소(字小)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작은 나라는 사대의 표현으로 중화가 요구하는 신하의 예를 갖추어 정기적으로 조공하고 천자가 사용하는 칭호, 복식, 의례를 일체 사용하지 않으며 천자의 연호와 책력을 기본으로 하여 천자가 만든 우주의 시간에 맞춰 국가를 통치하고 조공사를 파견할 뿐 국왕은 입조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상응해 천자는 이적의 군왕에게 관작(官爵)을 수여해 정통성과 지위를 보장하는 한편 조공에 대한 답례로 회사(回賜)를 베풀어 이적이 원하는 문물, 서적 등을 특별히 하사하고 무역을 허락했다. 조공제도는 초강대국과 약소국이 상호 평화공존공영을 보장하는 필요에 따른 국제질서였다. 중국인들에게 이 제도는 주변 약소국들을 다스리는 정책, 곧 "이적이 모의(慕義)해 귀복(歸服)하면 소와 말처럼 고삐를 채우고 관계를 단절시키지 말라"는 기미(羈靡)정책으로 귀결되었다. 역사는 고삐를 쥔 강자가 필요에 따라 약자를 언제 어느 곳에서나 강제할 수 있다는 비극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사회와 국제정치를 바라보면 강대국과의 관계는 그 이름만 다를 뿐이지 그 내용과 실체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왕에 대한 책봉 소식이 도착하면 조야의 군신과 백성들이 모두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벌이고 즉시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사은사(謝恩使)를 파견하는 조선시대 사람들만 독립과 자주를 상실했다고 공격할 수 없다. 우리는 당시의 국제관계와 외교에 대해 좀더 심도있게 연구·성찰해야 한다.

우리나라 비석과 비문에 보면 신라 때는 유당신라국(有唐新羅國), 고려 때는 유송고려국(有宋高麗國) 그리고 조선 시대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란 글귀가 적힌 조선 사대부의 비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묘소 비각에는 명나라의 제후국인 조선(유명조선국)이라는 글이 크고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고려는 이적 왕조였던 요와 금의 책봉을 받았지만, 유요고려국(有遼高麗國)이나 유금고려국(有金高麗國)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조선 역시 청의 무력에 굴복해 책봉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 연호는 사용했을망정 유청조선국(有淸朝鮮國)이란 표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병자호란의 치욕과 무력에 굴복한 강제외교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생각한다.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은 소중화(小中華)사상이다. 1705년 창덕궁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해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의 신종(神宗, 萬曆帝)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崇禎帝)을 제사지내고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를 추모하는 상징물이었음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오랑캐로 천대받던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의 공격으로 명(明)이 멸망해 중화의 주인이 사라지자 중국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오랑캐였던 조선은 스스로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를 자처한 것이다. 이것은 중화질서가 오랜 세월에 걸쳐 역사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고유한 문화뿐만 아니라 군사력과 선진문명이 있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망각한 사대부들의 탁상 논리에 불과하다.

로마(BC27~AD476)에서 동로마(324~1453)제국으로 이어지는 로마 1500년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오늘날 유럽에서 로마 아닌 곳이 없다. 로마의 멸망 이후 독일이 이를 계승해 그리스도교회와 일체가 된다는 뜻에서 신성로마제국(962~1806)을 세워 800년 통치하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라인동맹 16개 연방이 탈퇴하며 종말을 고한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로마제국의 이름은 유럽의 어느 나라나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이 800여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허명이 아니라 그 이름에 걸맞은 국력과 군사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체가 없는 이름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해왔다. 실체는 이론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세력과 슬기로 가능한 것이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