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사재기가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의 마트에서 쌀·라면·생활용품 등이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7일 긴급사태를 선언했지만, 이미 2주 전부터 사재기 움직임이 보였다. 코로나19 사태에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해온 일본이기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미국에서도 지난달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이후 식료품 등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시민들이 생필품을 사기 위해 마트로 몰려가고, 진열대는 비어 있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전해졌다. 선진국이 몰려 있는 유럽도 이러한 현상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코로나 사태 초기부터 사재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일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사재기는 없었다. 일종의 오보였던 것이다. 집단감염이 발생한 대구에서도 사재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시민들 사이에 마스크 양보운동이 펼쳐졌고, 확진자나 격리자들에게 생필품을 전달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러한 시민의식 덕분에 코로나19 확산세가 줄어들고 주민들도 일상생활을 찾아가고 있다. 20일간 대구에 머무른 정세균 국무총리는 "대구의 품격을 봤다"고 말했다.

사재기는 비상상황이 발생해 물건이 동나거나 값이 오를 것으로 예상될 때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두는 현상인데,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불안감에서 비롯된 사재기가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일으켜 사재기가 확산되는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우리나라도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 사재기가 벌어지곤 했다.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재기로 불릴 만했다.

마지막으로 사재기가 일어났던 것은 2010년으로 기억된다.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이 잇따라 발생한 뒤 여당인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전쟁불사론이 들끓었을 때였다. 그후로도 북한은 수시로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사재기는 더 이상 없었다. 김태형 심리학자는 "우리는 '곧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는 위기에 시달려왔다. 나라가 곧 망하기라도 할 듯이 위기를 조장하면서 권력을 유지해온 세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위기를 거치며 길러진 시민의식이 바이러스에 맞서는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사재기는 전염병처럼 번지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사재기가 발생하면 코로나 바이러스 못지않게 혼란을 부추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다른 적과 싸워야 하고 불필요한 사회비용을 치뤄야 한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다. 성숙한 국민의식이라는 말을 써도 무방할 듯하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