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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12. 13도창의대진 대대장으로 활약한 강화의병장 연기우 (하)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12. 13도창의대진 대대장으로 활약한 강화의병장 연기우 (하)
  • 인천일보
  • 승인 2020.03.29 20:12
  • 수정 2020.03.2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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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해가는 국운 속에서도 꿋꿋했던 저항정신

 

▲ 연기우·이근배 의병장 활약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소목개 마을. /사진제공=이우형 현강역사연구소장

 

▲ 연기우 의병장 의병활동지.

 

▲ 연기우 의병장 주 활동지 중의 하나였던 고랑포(1930년 전후).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하고, 이동이 용이한 곳으로 의병활동지로서의 여건을 갖춘 곳이다.

 

▲ 연기우 의병장 격문(훈시문) 관련 일제 기밀문서. <통감부문서> 6권(1909.04.16.) 일부.

 

▲ 연기우 의병장 전사 순국 기사.(매일신보. 1911.12.28).

 

▲ 연기우 의병장 부자 피체 기사.(매일신보. 1914.06.23).

 

서울진공작전 전개 도중 일본군에 붙잡혔다 탈출
부상 완쾌 이후 연천·삭녕·철원 등지서 활동 전개
1908년 4월 다시 강화도 돌아와 기존 의진과 연합
1909년초 황해도·고랑포 일대 헌병분견소 등 습격
경술국치 후 의병 줄어들었으나 항쟁 멈추지 않아
국내외 투쟁기록 150여차례 기술 … 활약상도 대단
총격 피살·체포 후 취조 보도 엇갈려 최후는 미상

◆ 서울진공작전 때 부상당해 피체 후 탈출

190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28일까지 13도창의대진 대대장으로 활약한 연기우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 피체되었다가 탈출하였다고 전한다.

“선생(허위-필자 주)께서 친히 감사병(敢死兵) 100명을 거느리고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되는 지점에 전군(前軍)이 와서 모이기를 기다려 일제히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후군은 시기를 어기고 일병이 졸지에 몰려와 장시간 사격을 몹시 심하게 하니, 이때 후군이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퇴진하였고, 김규식, 연기우가 모두 탄환을 맞고 붙잡혔다.” (허복,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 <독립운동사자료집> 2권. 241~242쪽)

“군사(軍師:허위)는 군려(軍旅:군대, 13도창의대진)를 정돈하여 진발을 준비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각도의 의려(義旅:의진)에 일제히 진군할 것을 재촉하고, 스스로 300인을 인솔하여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으나 각 의진은 이르지 못하였다. 일본군이 먼저 공격하니 분전하였으나 적의 저항에 퇴군하였다.” (필자 역·송상도, <기려수필>. 127쪽)

서울진공작전 때 13도창의대진 총대장 이인영은 300명, 군사장 허위는 1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나아간 것으로 나타나 있고, 이 작전에 참여한 의병은 2000명이었음을 전편에 상술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김규식과 연기우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는 것인데,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그는 피체되었다가 탈출하였으나 아우 연창수(延昌壽)는 사로잡혀 피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1908년 2월 이후에는 하상태·허위 등 유력 의병장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해 7월 이후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그가 이 무렵 부상에서 완쾌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가 약 200명의 의진을 형성하여 연천·삭녕·철원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음이 그 해 7월11일 한국주차헌병대장 아카시(明石元二郞)가 내부경무국장 마쓰이(松井茂)에게 통보한 기밀문서에 드러나 있다.

“연기우가 인솔하는 약 200명의 폭도는 근래 연천군 동탄 부근으로부터 삭녕·철원의 군 경계 부근에 출몰하는 형적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1권. 347쪽)

그리고 그해 9월에는 그의 의진의 좌익장 권복규(金福奎)가 120여 명을 이끌고 연천군 서면·관인면, 마전군 북면 등지에서 활약한 기록이 일제의 <폭도에 관한 편책>에 기록돼 있다.

◆ 다시 강화도에서 의병투쟁

1908년 4월 이후 황해도 배천 출신 김용기가 의진의 중대장 지홍윤·박계석과 연계하여 선단(船團)을 형성하여 강화도와 황해도를 오가며 의병투쟁을 벌일 때 이능권은 강화도에서 대동창의진을 이끌었고, 연기우는 다시 강화도로 돌아와서 이들 의진과 연계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한 것이 드러나고 있다.

“(1908년) 10월24일 약 80명의 적이 경기도 강화군 북사면(北寺面)에 내습한 건을 10월29일 ‘한헌경을(韓憲警乙) 제1246호’로써 통보한 바, 그 후의 정보에 의하면, 한 번 승선(乘船) 도주한 적은 26일 재차 내습, 수괴 김봉기는 부하 35명을 인솔하고 동군 간점면(良站面) 부근, 지홍일은 부하 30명을 인솔하고 동군 상도면(上道面) 부근, 연기호(延基鎬:연기우의 이명-필자 주)는 부하 15명을 인솔하고 동군 내가면(內可面) 방향으로 나눠 각각 금품을 약탈하고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185쪽)

그러나 일본 군함과 수뢰정이 강화도·황해도 앞바다에서 의병들의 선단을 공격하게 되자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에서 활약하던 의병장은 그 해 11월 이후에는 대부분 의진을 이끌고 경기도·황해도 지역 육지로 나가거나 의진을 해산하고 은신하기에 이르렀는데, 연기우는 다시 경기도 연천·영평·장단, 황해도 평산·토산, 강원도 철원을 중심으로 의병투쟁을 이어갔다.

◆ 경술국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의병투쟁

강화도를 빠져 나온 연기우는 그 해 11월17일 의진 28명을 이끌고 경기도 영평군(현 포천군) 일동면에서 의병활동을 하였고, 이듬해인 1909년 1월 초에는 그가 약 300명의 의진을 이끌고 황해도 토산군 시변리헌병분견소와 안협읍을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에 일제는 안협주재소 순사 가족을 이천읍으로 피난시켰다는 것이 일제의 기밀문서에 나타나 있다.

“이천헌병분견소 헌병은 안협순사주재소로부터 안협읍 부근에 폭도(暴徒:의병-필자 주)가 출몰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양민을 괴롭히고 있다고 하며, 또 토산 헌병으로부터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연기우가 약 300명을 인솔하고 토산군 숙강면(이천읍 남방 약 10리)과 석적면 부근에 출몰하여 그 세가 심히 창궐하여 토산군 시변리헌병분견소와 안협군 방면에 내습할 우려가 있다고 한다. (중략) 수괴 연기우는 최근 토산군 시변리헌병분견소와 안협읍을 습격, 다시 나아가 이천군을 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천읍에는 수비대·헌병·경찰 등이 있어 읍민은 안도하고 그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안협읍에는 적은 인원의 경찰관이 있을 뿐이므로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현재 그곳 주재소 순사의 가족은 유아 3명을 데리고 이천읍에 피난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38~39쪽)

그는 강기동·이은찬·이진룡·하상태 등이 이끄는 의진과 서로 연계하면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약하던 전 간도관리사이자 전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우 이범윤(李範允)이 남하하자 이은찬과 함께 연합작전을 전개하던 그는 이에 공조한 것이 <통감부문서> 10권(1909.01.31)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윤인순(尹仁順) 의진과 합진하여 300여 명의 의진으로 장단군 고랑포에 ‘음력 1월30일까지 고랑포 헌병분견소를 습격할 것이니, 서민들은 미리 다른 곳으로 피난하라’는 통문을 보낸 후 공격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1909년 음력 2월 이후 의진의 명칭을 ‘창의존양군수부(倡義尊壤軍帥府)’라 하고, 격문을 통하여 의병을 칭탁하고 민간에 불법을 자행하는 자와 헌병보조원 등은 군율로 다스릴 것이고, 의병과 포수는 의진으로 보내어 국가의 위급을 구하자는 내용이 일제의 <통감부문서> 6권(1909.04.16)에 드러나는 등 통문과 격문을 통하여 의병 참여와 함께 일제와 그들에게 협력하는 헌병보조원·일진회원의 죄상을 논했다.

그는 그 해 7월 이후 동한창의존양대장(東韓倡義尊攘大將)이라 칭했는데, 비록 의병의 수는 종전에 비해 적었으나 경술국치 이후에도 의병투쟁을 이어나갔다.

◆ 길이 빛나는 충혼

일제는 연기우 의병장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그는 1909년 1월13일, 다리에 총상을 입고 황해도 토산군 숙인면에 잠복하고 있다는 밀고에 따라 일본군경이 급습했으나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고, 그해 4월에는 부대를 일단 해산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무기를 구입해 왔다는 것과 이진룡과 함께 의진을 해산하고 경성에 잠복했다는 등 그의 의병투쟁 기록은 <폭도에 관한 편책>에 150여 차례 나오고, 그 내용도 대단하다.

그가 1911년 12월23일 가평군 파견소 헌병대에 의해 총탄 세 발을 맞고 사살되었다는 내용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11.12.28)를 통해 보도되었으나 1914년 6월 28일, 인제분대 암정파견소 헌병들이 6월14일 연기우 부자를 체포하여 취조 중이라는 매일신보의 보도가 있으나 재판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고,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2015.08)로 선정하고, 그의 충혼을 기리고 있다.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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