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식모살이로 생계를 이어오다 어느 식당 주인의 소개로 16살부터 미군클럽에서 일하기 시작한 장영미(72) 할머니는 이태원, 송탄, 평택 등으로 거처를 옮기며 30여 년간 미군 위안부 생활을 해왔다. 지난날을 떠올리며 창밖을 바라보던 장 할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다.
사진 속 장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 다른 미군클럽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는 장 할머니가 당시 동거하던 미군과 함께 찍은 사진도 눈에 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2살에 고아가 된 장 할머니가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라는 반려견 누렁이와 함께 방 안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장 할머니는 "똥개들만 보면 버려졌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라고 말했다.

 

19년째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생활을 지원해 온 '햇살사회복지회'에 할머니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장 할머니는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복지회에 방문하는 일이 뜸해졌다.
장 할머니의 집에 방문한 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대표가 지원 물품을 전달하고 있다.
장 할머니가 평택기지 정문 앞 태극기와 성조기가 휘날리는 거리를 지나고 있다. 2018년 2월 서울고법 민사22부(재판장 이범균)는 기지촌 위안부 11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한민국이 '군사동맹, 외화획득'을 위해 미군 기지촌을 운영·관리하면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조장했다고 인정한 첫 판결을 내놨다.

 

장 할머니가 인터뷰 도중 과거를 회상하며 슬피 울고 있다. 뒤로 보이는 쇠창살이 할머니의 감옥 같았던 지난날을 말해주는 듯 하다.
거동이 불편한 장 할머니가 집 앞에 앉아 자신이 생활해 온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할머니는 성매매 생활을 접고 클럽 웨이트리스로 일하기 시작한 40살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홀로 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중 만들어진 인권선언의 제1조이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프랑스 혁명에서 보여준 인권선언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타자(다른 사람)'를 아예 존재하지 않는 유령인간처럼 취급하거나 애써 모른 척한다.
국가 이익 앞에, 계급 이익 앞에, 자본 이익 앞에, 인간의 왜곡된 욕망 앞에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은 언제나 '타자'의 존재로 남게 된다. 그리고 '타자'는 차별과 혐오,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미군 기지촌 성매매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는 아픈 역사의 단면이다. 


국가는 여성의 몸을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철저히 도구화했다. 당시 기지촌 관련 산업이 대한민국 전체 GNP의 25%를 차지했다. 성매매 여성 1인이 버는 외화에 가족, 지역 사회, 국가가 기생한 것이다. 


국가는 이들을 '애국자'라며 치켜 세웠다.


하지만 기지촌 여성들은 양공주, 양색시 등으로 불리며 사회적으로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았다.  


결국 기지촌 여성들은 국가의 지휘 아래 애국심을 빙자한 인권유린으로 억압당하고 사회적으로 윤락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개인의 삶을 잃어갔다. 


사회는 여전히 침묵했다. 침묵은 곧 피해자를 억압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 피해 여성들이 더는 숨지 않도록 우리가 말해야 한다. 그들의 문제를 타자의 문제가 아닌 '우리' 문제로 확장해야 한다. 


기지촌 알리기에 앞장 섰던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타자는 어디선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라며 "당사자들이 서로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 내부의 곪은 상처를 드러내야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고 새살을 돋게 할 수 있다. 진정한 정의는 올바르지 않은 정의를 똑바로 마주할 때야 실현할 수 있는 가치임을 되새겨야 한다.

 

/글 최남춘·사진 이성철 기자 baikal@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