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덕   


차표를 찍으며 사람 없는
바람조차 없는 길 건너 얼굴 바꾸며 돌아가는
입간판을 봅니다. 가득한 슬픔으로도 내내 제자리를
쉬지 않고 돌아가는 입간판 하나만큼도 넉넉해질 수 없는
세월이군요. 멀리서 무너지는 빙벽의 소리를
듣습니다. 겨우내 위태를 즐기며 지나온 길들이지만
아예 흔적조차 없을 시간이라 믿으며 살았고 죽어
왔습니다. 차표를 바지 주머니 깊이 밀어 넣으며
당신이 늘 찢어진 반대편에 위치하는 것은
내 그리움이 아직도 좁은 물길을 따라 흐르는 탓이리라
자책하며 이렇게 흐린 봄날 저녁
옆자리 중년 사내의 그늘진 표정 아래 몸 숨깁니다.
오늘도 나는 정체불명일 따름입니다.

바람이 없어도 입간판은 내내 쉬지 않고 얼굴을 바꾸며 돌아간다. 입간판을 돌아가게 하는 추동력은 바람이 아니다.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듯이, 가득한 슬픔의 힘으로 얼굴을 바꾸며 돌아간다. '스스로'를 제어하는 힘을 가진 입간판과는 달리, 시인은 가득한 슬픔으로도 넉넉해질 수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당신이 나와는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비극성은 여기서 출발한다.

당신은 늘 찢어진 반대편에 위치한다. 그것은 아직도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늘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당신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나의 그리움 때문에 당신이 늘 반대편에 있다는 시인의 발상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사실, 당신은 넓고 넓은 세상의 구석구석 어디에도 있지만, 나의 그리움이 당신을 반대편에 위치시키고, 벌어진 틈마다 숨어 있게 만든다. 그래서 더욱 찾기 힘든 존재이다. 오늘도 화자가 정체불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당신이 없는 세월과 나의 존재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나를 완성시키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나는 언제나 당신에 의해서만 드러나며, 나의 존재 역시 당신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자학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찾아야만 하는 이 비극성에서 우리는 찢어진 존재의 숭고함과 삶의 비의(秘意)를 느낄 수 있다.

/강동우 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