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치밀한 계획대로…1876년, 조선의 문은 열렸다
▲ 조선정벌 여론을 불러일으키려 한 니시키에가 그린 일본군의 강화도 상륙 모습.

 

 

▲ 일본군함의 모습. /출처=강화도조약사진첩

 

▲ 인천 중구 영종진 공원 건립된 '영종진 전몰 영령 추모비'의 모습. /인천일보 DB

 

떠오르는 신흥제국이 된 일본
수차례 교섭 반대한 한반도에
신식군함 '운요호'로 무력시위
영종진 병사만 35명 숨졌으나
'역선전'으로 조선 반감 일으켜
이를 빌미로 '강화도조약' 맺고
부산·원산에 이어 인천도 개항





거듭되는 이양선의 출몰과 강화와 인천 앞바다를 피로 물들인 병인, 신미양요를 무릅쓰고도 쇄국의 문을 열지 않던 조선은 드디어 1876년 세계에 문을 열게 된다.

한때는 세계 최강대국이자 동아시아를 조공제도로 다스렸던 중화제국이 쇠락해가는 것과는 반대로, 막부체제 하의 일본은 1854년 미국 페리 함대의 통상 요구를 수용해 불평등조약을 맺고 자발적으로 문호를 열고 부국강병에 힘써 떠오르는 신흥 제국으로 부상했다.

허약한 봉건 막부체제가 무너지는 동시에 1868년 메이지유신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급속한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게 됐다. 그 과정에서 메이지 정권은 대내적으로는 국가권력을 통합하고 대외적으로 국위를 드러내며 열강의 각축 속에서 이권을 도모하고자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마침내 조선 개국을 무력으로 강제했다.

메이지 일본은 조선과의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서 1875년에 여러 차례 교섭을 촉구하는 서계를 보냈다.


조선 정부가 서계 접수를 거부하자 일본은 무력행사에 나섰다.

1875년 4월에 일본의 신식 군함 운요호가 예고 없이 부산에 입항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다. 1875년 8월, 운요호가 다시 황해바다에 출현했다. 8월20일 운요호는 월미도 앞바다에 나타난 후 다음날 북상하여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정박했다. 이곳에서 단정(短艇)을 내려 20명가량의 수병들을 태우고 항산도(현재 초지1리의 황산도) 근방에 이르러 육지를 관측했다.

허가를 받지 않고 무단 상륙한 일본군에 대해 조선군이 포격을 가하자 함장 일행은 소총으로 응사하면서 후퇴했다. 단정이 돌아오자 운요호는 포격을 개시했다. 운요오호의 함포에서 발사하는 포탄은 초지진과 포대에 명중하여 진지를 완전히 파괴했다.

운요호는 초지진 상륙을 대신해 남하하여 영종진을 포격하고 일시 점령했다. 2척의 단정으로 상륙한 일본군은 50여 명에 불과했으나 조선군은 이조차 막아내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영종진 병사 중 35명이 사망한 반면 일본군은 2명만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은 대포와 군수품을 노획한 뒤 성내에 불을 질러 관아건물과 민가를 완전히 불태우고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일본으로 귀환한 운요호는 식수를 구하기 위해 초지진에 접근했다가 포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응사했다고 역선전하며 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반감을 북돋았다. 당시 일본의 언론에 보도된 운요호사건은 니시키에(錦繪)의 그림이다. 일본의 메이지 언론은 자극적인 니시키에의 이미지를 통해 조선정벌 여론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연이어 조선정부에서 일본인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며 부산 초량의 일본 공관과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함을 부산 앞바다에 출동시켰다. 일본의 무력행사에 충격을 받은 조선 정부는 강경책을 접고 일단 서계 원본을 접수하기로 하고 접견대신으로 신헌과 부관 윤자승을 임명해 강화로 파송해 일본과 교섭하도록 했다.

일본은 교섭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군사 동원체제를 갖추고 전권변리대신으로 구로다를 보냈다. 1875년 12월19일에 부산에 입항한 그는 조선과의 협상장소로 초지진 대신 강화도 감영을 지목했다. 강화도에서 열린 양측의 회담에서 결국 조선 정부는 조선의 개항을 결정, 1876년 2월3일(음력)에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됐다.

일본과의 수호조약 체결은 곧바로 부산의 개항으로 이어졌다. 부산을 거점으로 조선 침략에 노심초사하던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는 1877~9년 동안 해안 일대를 측량하면서 개항장을 추가 개설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일본은 수시로 황해바다 연안을 드나들면서 해도를 정밀하게 작성했다. 일본은 1879년 동해의 원산 개항 허가를 얻어냈지만 수차례나 탐색하면서 교도부로 노렸던 인천의 개항은 끝내 거절당했다.

그 와중에도 조선 정부는 오히려 인천 해안과 부평에 포대와 진(화도진과 연희진)을 설치, 왕도 한성의 관문인 인천에 빗장을 걸었다. 하지만 집요한 일본의 요구에다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통상 요구가 가세하면서 더 이상 수도의 보장중지(保障重地)인 인천 개항을 물리칠 수 없게 됐다. 결국 1881년 초, 일본 변리공사 하나부사에게 20개월 후에 인천을 개항할 것을 약속했다.

 



전사자 35인 기리며 세운 '영종진 전몰 영령 추모비'…이들 이름도 찾아 새겨야

 

▲ 인천 중구 영종진 공원 건립된 '영종진 전몰 영령 추모비'의 모습./인천일보 DB
▲ 인천 중구 영종진 공원 건립된 '영종진 전몰 영령 추모비'의 모습./인천일보 DB

 

영종진 피격 사건은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치밀한 계획 아래 영종진을 기습 공격하면서 벌어졌다.


영종진 피격 사건은 운요호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던 강화도 조약의 빌미가 됐다는 이유로 치욕의 역사로 기억된다.

당시 일본군은 50여명에 불과하였으나 조선군은 영종진 병사 중 35명이 사망하였으며 일본군은 2명만이 부상했다.

인천문화발전연구원은 패배한 역사도 소중하다는 신념 아래 2005년부터 '영종진 전몰 영령 추모제'를 시작했다. 지금은 매년 9월이면 '영종진 헌향 사업회' 주도로 추모제가 열린다.


연구원과 사업회는 6년 전 영종진 성곽을 복원하는 사업도 추진했다. 당시 사업회 주도로 영령들을 찾기 위한 노력을 펼쳤지만 민간 연구 단체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2013년 인천도시공사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영종진 공원을 조성하면서 조국을 위해 전사한 영령 35인을 기리는 전몰 영령 추모비를 세웠다.

하지만 비석이 생긴 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령들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이 당시 인적 자료를 수탈해가면서 전사자 명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종진 피격 사건은 치욕적인 역사라는 이유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인천지역의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고 영령들의 이름을 밝혀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