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정권 시절, 대구는 대표적인 야당도시(野都)였다. 1955년 9월13일자 대구매일신문에 '학도(學徒)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이 실렸다. '영원한 반골 기자' 몽양 최석채 주필의 글이었다. 정부·자유당 고관들이 대구로 내려올 때 중·고교생들을 가두 환영에 동원하는 작태를 비판한 것이다. 이튿날 대낮에 괴한 20여명이 신문사엘 쳐들어 와 기자들을 폭행하고 윤전기를 박살냈다. 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960년 2월28일에는 자유당 정부의 폭거에 맞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 2·28 의거'였다.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대구 유세가 열리는 날이었다. 자유당 정부는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갈까 봐 일요일인데도 등교를 시키거나 토끼사냥 등에 동원했다. 경북고·대구고·경북대사대부고 등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면서도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고 외쳤다.

▶대구는 일제강점기때부터 영남의 교육도시로 성장했다. 부산이나 멀리 진주에서도 유학(遊學)을 오는 고장이었다. 선비적 자존감과 고집, 뚝심도 그런 지역적 전통에 기인한다. 대구의 지역적 정서는 한마디로 직정(直情)이다. 덥고 추운 고장이다. 음식은 맵짜고 목소리도 크다. '경우 없는 사람'으로 호가 나면 행세하기 어렵다. 주변을 의식해 애둘러 말하지도 않는다. 쓸데없이 말만 많은 이들도 경계의 대상이다. 그래서 "싸나짜슥이 조디(입)만 살아가지고"가 큰 욕이다. 상대적으로 과묵한 사람들이다. 당연히 말솜씨도 좀 떨어지는 편이다. 대구에 이런 일화가 전해온다. 초상집에 문상을 가 상주와 맞절을 하고 나면 위로의 말을 건넨다. 예전에 어떤 이가 "우찌 이리 직접 돌아가셨습니까"라고 했다고한다. 그런데 원래 그가 하려던 말은 "우찌 이리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까"였다는 것이다.

▶정이 깊고 오랜 의리 관계를 중시하는 점도 대구의 한 특성이다. 아직도 계(契)모임이 성해 '계추(계의 사투리)식당 골목'도 있다. 동대구역 뒤편 후미진 골목길에 많다. 대개 매월 한 차례씩인 단골 계모임들을 유치해 장사를 한다. 방 구조와 메뉴도 계모임에 딱맞다. 이런 끈끈한 지역 전통은 현대사의 고비마다 존재를 드러냈다. 일제의 침탈에 맞서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을 올린 곳도 대구다. 한국전쟁때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냈다. 아픔도 크게 겪은 고장이다. 2003년 2월18일, 지하철화재참사를 당해서는 192명의 시민들이 희생됐다. 당시 사고 현장에서 물에 젖은 습작시 한편이 발견됐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이런 시를 남기고 갔다. '울면서 봄이 가는 것을 본다/갑년(甲年)을 바라보는 봄의 한때/처연히 지는 꽃을 보면서/상장(喪章)처럼 울고 있다(후략)'

▶코로나19의 창궐을 맞아 다시 대구가 울고 있다. 지하철참사처럼 또 2월에 벌어졌다. "지금 바로 대구로 와달라"는 대구의사회장의 호소문이 가슴을 친다. "단 한 푼의 댓가, 한마디의 칭찬도 바라지 말고 피와 땀과 눈물로 대구시민들을 구합시다."라고 했다. 광주와 부산에서도 "대구 환자들을 보내달라"며 나섰다. 고사리손들의 마스크 보내기도 이어진다고 한다. 이런 대구의 눈물에 소금을 뿌린다면 심성이 잘못된 사람이다.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