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창영 평화협정운동본부집행위원장

지난 1월24일 이라크 바그다드의 중심 광장과 도로는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백만 인파로 가득했다. '미군 나가라',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등의 구호가 물결쳤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미의 물결을 이룬 것은 이라크 역사상 처음이다.

시계를 17년 전으로 돌려 2003년 3월20일에 맞추면 바그다드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미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시내 곳곳에 화염이 피어오르는 장면이 전세계에 중계되었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상살무기가 있을 것이라며 침공했지만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10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애꿎은 이라크인들만 희생당했다. 미군의 폭격에 남편과 자식을 잃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던 여인의 음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이 나라에 대량살상무기는 없다. 그러나 이 순간 내 가슴 속에서 대량살상무기가 자라고 있다."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이라크는 친미정권으로 거듭나 미국의 중동 지배 전략에 순응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보듯이 이라크에는 반미의 물결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이라크가 미국에 맞설 만큼 강해진 것은 이라크 저항세력의 끈질긴 투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결정적인 힘은 이란의 건재에서 나온다.

천안문 사태와 소련의 해체 등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로 이어지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미국은 세계 지배 전략에 날개를 달게 되었다. 이른바 미국 일극(一極)체제의 시작이었다. 이라크와 이란을 친미화해 중동을 장악하면 세계 지배 전략은 사실상 완성되는 셈이었다. 국제정세 전문가들은 이라크 다음으로 이란이 미국의 침공 대상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란은 강력한 무장력으로 미국과 대결하면서 핵 개발까지 불사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을 둘러싼 작금의 대결에서 보듯 이란은 중동의 친미국가 이스라엘은 물론 미국까지 위협하면서 맞서는 중이다.
이러한 정세를 타고 이라크가 미국에 거세게 저항하며 미군 철수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중동 전략의 파탄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아시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와 군사력으로 미국의 아시아 지배 전략은 완전히 파탄됐다. 아시아와 중동의 반미자주화 움직임으로 미국의 세계 전략이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국제정세의 핵심이다. 전세계에서 미군 철수는 시간문제다. 2월 29일 미국과 탈레반 사이에 평화합의가 타결됨으로써 아프간에서도 14개월 안에 모든 미군이 철군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의 종착점에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가 놓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기와 성조기가 시위대에 짓밟히고 있는 이라크와는 달리 광화문 광장에서는 성조기와 이스라엘기가 태극기와 더불어 펄럭이고 있다. 정세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몰락해 가는 미국에 의지하는 일단의 모습들이다. 얼마나 갈까? 아마도 4월에 있을 총선까지는 안간힘으로 갈 것이다. 총선 결과에 따라 사그라질 수도 있고 더욱 기승을 부릴 수도 있다. 이번 총선이 중요한 이유다.

투표와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자주의식이다. 백만 명이 모인 바그다드의 반미 시위는 광화문이나 서초동을 가득 메운 촛불집회를 연상케 했다.

민주주의와 개혁의 촛불은 자주의 횃불 없이는 온전히 지켜내기 힘들다. 이제는 자주의 횃불을 들어야 할 때다. 지난 촛불집회 시기에 나온 '자주 없이 민주 없다'는 구호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