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승용차 뒤에 붙인 '착하게 살자'라는 스티커가 유행했다. 발음대로 '차카게 살자'를 단 차량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왜 그런 내용을 붙이고 다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름대론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그래도 착하게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담은 글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착함'이란 무엇일까. 자문(自問)을 이어가면서 한자어 '선(善)'을 떠올렸다. '먹물 먹은 자(者)'의 습성이랄까. 우리말을 제쳐두고 한자를 떠올리니 말이다. 어딘가에선 "척하지 말고 착해라"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잘난 척 하지 말고 착하게 행동하라는 얘기다. 아무튼 아주 도덕적이긴 해도, 착하게 사는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여겨진다.
유명한 예수의 비유를 들어보자. '선(善)한 사마리아인'으로,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일화는 이렇다. 예수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자, 유대인 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가 말한다. 길을 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심한 상처를 입었다. 신앙심이 깊다고 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모른 체하며 지나쳐버렸다. 그때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의 상처를 싸매고 주막으로 데려가 주인에게 그를 돌봐주라면서 돈까지 준다. 이를 들은 두 사람은 망연자실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경멸하고 이교도 하층민으로 천시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네 생각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명백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는 화답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기서 한번 돌아보자. 과연 두 유대인은 죄업(罪業)을 지었는가. 악행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으니, 죄라면 죄다. 불의(不義)를 맞딱트리고도 정의(正義)롭지 못했으니, 그 또한 못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예수는 '선한 사마리안'에서 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유대인들의 죄를 논하지 않는다. 두 유대인의 잘못도 꾸짖지 않고 '장벽'을 허무는 사랑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저 선업(善業)이란 무엇인가를 일깨웠다. 예수의 위대성을 상기하는 가르침이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글귀도 우리를 일깨워준다. 선한 일을 한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뒤따른다는 뜻. 착한 일을 많이 하면, 후손에게 복이 미친다는 말이다. 주역(周易)의 문언전(文言傳)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이 글 가운데 "선을 쌓은 집안엔 꼭 남는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엔 꼭 남는 재앙이 있다"고 했듯, 선업은 후광(後光)을 비추기 마련임을 시사한다. 장자(莊子)도 말한다. 일일불념선 제악개자기(一日不念善 諸惡皆自起)-하루라도 착한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여러 악한 게 모두 저절로 일어난다. 우리 속담 속 '남향집에 살려면 3대가 적선해야 한다'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얻기 어려운 일을 찾으려면 선을 쌓고 또 쌓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선행을 권장하는 말은 많다. '마음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이 굽어보신다'는 구절도 그렇다. 마음을 바르게 써야 神明(신명)도 알아 보살핀다는 속담이다.

선행은 꼭 재물로 남을 돕는 일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이들을 다시 일어서게 할 수 있다. 지금 코로나19 사태로 온나라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도 많은 국민이 훈훈한 마음을 전한다. 저마다 조바심을 내면서도 SNS를 통해 "힘내라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며 응원한다. 특히 감염이 무섭게 확산한 대구·경북지역에 대해 안쓰러워하며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 어떤 건물주인은 코로나19로 인해 어렵게 버티는 자영업자들에게 월세를 받지 않거나 깎아주기도 한다. '착한' 임대주다. 취약계층을 돕는 기부행렬과 공짜 마스크 제공 등도 줄을 잇는다. 의료인과 공직자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감염 확진자·접촉자 등을 점검하느라 안간힘을 쏟는다. 생명을 다투는 일이기에 더 과감하게 달려들어 씨름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렇게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코로나19는 점점 물러가리라 믿는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선행은 코로나19를 이겨내는 원동력이다. 우리 사회에 착한 일을 할 곳은 널렸다.

논설위원 이문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