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을 차단하기 위한 사투가 계속되면서 나와 너 사이 거리두기가 기본 철칙이 되었다. 나는 너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하고 가능한 멀리할 수록 서로 안전하다는데 학생을 맞이할 준비기에 개학까지 미뤄두고 예상해보는 학교 풍경이 짠하다. 교문 앞에서 학생들을 맞이하다가 뻘쭘할 장면이 그려진다.

지난해에도 미세먼지가 등굣길 얼굴들을 지워 버리는 날이 많았다. 마스크를 쓰면 표정 식별이 어려워 눈끼리는 웃고 있어도 반응이 엇갈릴 때가 있다. 나는 마스크를 벗고 학생은 쓰라고 하자니 비교육적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얼굴을 가린 채 인사를 나누자 하면서도 입 없이 말하자는 듯 실없는 소리로 웅얼대고 만다. 마스크가 더러운 먼지를 막으려다 애꿎게 사람의 표정부터 걸러내고 있다.

내가 내쉰 숨을 내가 들이마시며 오가는 생활도 하염없이 길어져 간다. 시큼 달큼하다가 구리기도 해서 역겹기도 한 냄새를 마스크 안에서 연신 삼키며 습관이 되어버린 질문이 있다. '나라는 구성체는 나에게만 이라도 온통 안전할까?'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돌아가는 호흡기 순환경로만 지키면 나라는 몸뚱이가 숙주로 제공되는 일은 없을까? 격리와 배제가 일상이 되어버린 후 각자 몸 건사하는 일이 지선이 되었지만 심술궂은 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잡념이다. 사찰이 산문을 닫고 교회와 성당이 성전을 폐쇄하는 지경에 이르고서야 몸을 신전으로 받드는 생활을 수긍해 보지만 고개를 기웃거리며 재차 묻는다. '나는 너와 얼마큼 떨어져 있는 몸이라야 안전한가?'

미세먼지는 밖에 있어 일방 경계로도 어느 정도 방어를 장담할 수 있었다. 코로나19는 다중 경계로도 불안하다. 내 속에 있는 지 밖에 있는 지, 나도 너도 신뢰를 입증할 수 없다. 요즘 마스크는 너와 나를 동시에 차단한다. 한 쪽이 임의로 풀 수 없는 상호 보증 표시가 되었다. 미세먼지 마스크 때는 학생들이 '선생님도 쓰세요'라는 말이 기껍게 들렸다. 그 마스크는 학생들에게 권하기도 쉽고 풀자고 하기에 부담이 덜했다.
코로나19 마스크는 말을 건네기가 어렵다. 착용과 해제 시기를 의논하고 함께 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너를 위해 쓰는 마스크를 가르치려면 더 힘겹다. 때로는 내가 너보다 더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더러움에 함께 오염될 수 있는 너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비춰 찾아 낼 수 있다면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바이러스가 사람과 사람 사이 간극을 벌려 놓으면서 일상을 뒤흔들어 놓는다. 술자리 대세 문화였던 잔돌리기는 B형 간염 바이러스 이후 종적마저 희미해 졌다. 한때는 큰 술잔을 돌려가며 비우던 의례 아닌 의례도 있었다. 냉면대접에 한가득 따른 술을 구성원 모두가 나눠 마시는 뒤풀이를 종교 의식을 빗대 애찬식이라 불렀다. 술 때문에 사랑이 더 돈독해졌을 리는 없지만 좁혀진 거리만큼 옆사람이 다가왔다. 함께 웃고 울다가 나눈 한사발 술기운은 새벽녘이면 옷이며 얼굴에 너저분한 자국을 남겼다. 김치 국물이 튀고 막걸리 사발이 엎어졌을 것이다. 지저분하다고 밀쳐 내고 흔적 더럽다고 도려내지 않았다. 다음 날 거리에서 최류탄 가스를 나눠 마신 건 나와 너가 얼룩으로 이어져 있어서였다. 마스크를 썼어도 웃음이 보였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마스크를 쓰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애덤 윌킨스는 '얼굴은 어떻게 인간을 진화시켰는가?'에서 얼굴이 매우 정교하고 민감한 의사소통 도구라서 뇌와 함께 진화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21개 얼굴 근육 중에 12개가 입과 코 주변에 위치해 있다는데 마스크는 공교롭게 그 부위를 감춘다. 표정이 가려진 얼굴들이 만드는 사회는 어느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갈까? 삶은 이어져야 하고 학교는 문을 열어야 하는데 서로가 서로의 더러움과 몸을 섞지 않고서 넘어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닐까? 마스크를 벗을 수 없으므로 눈빛이 스칠 때마다 주문을 외운다. 너를 위해 마스크를 쓴 얼굴은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

임병구 인천석남중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