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동부보훈지청은 3·1절을 계기로 25~28일 지역 내 생존 애국지사 박기하 선생 및 민족대표 33인 중 박동완, 손병희, 오세창, 이갑성, 홍기조 지사 등 5인의 유족들을 방문, 대통령과 국가보훈처장 명의로 위문한다.

박기하 애국지사는 이천에 거주하던 14명의 소년들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1939년에 조직한 '황취소년단'의 단원으로, 한국독립과 민족단결을 촉구하는 벽보를 붙이는 등 어린 나이에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정부는 박기하 지사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박동완 애국지사는 포천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만주,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병사했다. 정부는 박동완 지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손병희 애국지사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이다. 동학혁명에 참가했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했다. 이후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했다. 이후 일본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돼 서울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세창 애국지사는 서울 출신의 천도교인이다. 23세의 약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이후 농상공부 참의 등 여러 직위를 역임했다. 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한 뒤 천도교에 입교했고, 1917년 귀국해 만세보와 대한민보사를 창설하고 사장으로 취임해 민족계몽운동을 벌였다. 이후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고 3월1일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갑성 애국지사는 경상북도 대구 출신의 기독교인이다. 독립선언서 문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그 취지에 찬성해 기독교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했다. 이후 만세운동 당일날 조선총독부에 미리 의견서를 제출하러 갔다가 체포돼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상해로 망명해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광복 후 여러 정당 단체의 고문으로 추대되는 한편 1952년에는 전시내각의 국무총리에 임명되기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홍기조 애국지사는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천도교인으로서 동학혁명에 가담했다. 1910년 이후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국외 독립단체에 제공하는 등 조국광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고, 3월1일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용인=김종성 기자 jskim@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