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도 알 길 없는데 국가마저 활약상 잊어

 

 

▲ 지홍윤 의진의 주요 활동지이자 총상을 입은 의병들이 읍급치료를 했던 석모도.

 

 

▲ <강화부지> 속의 '심부전도'와 '심부내성도'(1907년경. 데라우치문고 소장. 필자 촬영)인데 당시 지명이 잘 드러나 있다. 심부(沁府 강화부 옛 이름)전도에 표시된 지역은 지홍윤 의진의 주 활동지.

 

▲ (왼쪽)지홍윤 의병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한국지사소전>(1939)에 실린 66인 중, 19번째로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다시 <자료한국독립운동> Ⅱ권(1943)에 실렸다.
▲(오른쪽)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의 지홍윤(지홍일로 기재) 의병장 피체 기록.

 

▲ <폭도에 관한 편책>에 있는 지홍윤(지홍일로 기재) 의병장 피체 기밀보고서 원문.

일본군 1개 중대 격파 등 큰 공적 세워 임정의 '광복군소사'에 19번째로 소개
보훈처 '공훈록'엔 고작 세 문장 기록…이진룡·이근수 의진과 연합 활동 빠져

◆ 지홍윤 의병장의 피체와 진술
1909년 2월4일, 인천경찰서장 경시 미야다테(宮館貞一)는 경기도 강화 지역뿐만 아니라 황해도 배천·연안·평산 등지에서도 명성을 떨치던 강화의병장 지홍윤(池洪允·일명 지홍일池洪一)을 1월30일 개성경찰서 순사대가 체포했다는 것과 그의 행적에 대하여 내부경무국장 마쓰이(松井茂)에게 보고하였다.

경기도 강화군 읍내면
폭도수괴(暴徒首魁:의병장-필자 주) 지홍일(당 45세)
一. 경력
본인은 강화군 강화읍내에서 출생하여 정년(丁年:20세-필자 주)에 이르러 소집되어 강화 전 진무영(鎭撫營:조선후기 강화도에 설치되었던 진영-필자 주) 진위대 병정이 되고, 재역(在役) 2년에 부교(副校)가 되어 제주도에 주둔을 명받고 동지(同地) 재역 3년 만기 제대 후 동지에 거주하기 3년으로 지난 융희 2년 봄 본적 강화에 귀래하여 다른 사람들과 서로 왕래, 기맥을 통하고 동년 4월 말 처음으로 도당(徒黨) 40~50명을 인솔, 황해도 배천군 불암리 및 강화 제도(諸島)의 각 면을 횡행, 폭거를 하기에 이르렀다.
一. 범적(犯跡)
융희 2년 4, 5월부터 7, 8월에 걸쳐 황해도 평산군·배천군·연안군 및 강화 17면, 신도·시도·장봉도·주문도·아비도·망도·말도 등의 각지에 전전 횡행 약탈을 자행하고, 동년 9월 자칭 의병대장 김봉기(金鳳基:김용기金龍基의 이명-필자 주)와 서로 호응, 기맥을 통하고, 동(同) 돌격진(突擊陣) 부장(副將) 지홍일이라 자칭하고, 10월 중 강화군 간점면(艮岾面)에서 강화분견소 헌병 및 보조원의 한 부대와 접전, 3시간여에 이른 일이 있다. 그달 해주로부터 강화도에 와서 외가면(外可面) 삼거동(三巨洞)에서 일본인 고려자기 도굴범 6명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
본인이 강탈한 금전 총액은 대략 1만여원이라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권. 259쪽)

이어 2월8일 개성경찰서장이 경무국장에게 지홍윤 의병장 피체와 관련된 보고가 있었다. 대한매일신보(1909.02.19.)는 그가 2월16일 인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하였으니, 압송되기 전의 보고인데, 나흘 전 인천경찰서장의 보고와 다소 차이가 있다.

"20세에 강화도 진위대에 들어가서 35세까지 본영 군조(軍曹:일본의 하사관을 통칭하는 용어로 주로 중사를 지칭함-필자 주)가 되어 퇴직 이래 교동군내에서 상업을 경영하고 있었던 바, 작년 4월 의병이라 칭하는 자가 각처에 봉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표방하고 일본의 보호를 탈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동년 4월 하순 강화도에 가서 장인선(張仁善-당시 부하 20명이 있었다)이라고 칭하는 자의 부하가 되어 소대장에 피선, 각처에서 인민으로부터 금전을 약탈하고 있던 중, 장인선은 작년 7월 체포당함으로써 이의 대장(隊長)이 되어 각처를 배회 중, 김봉기가 인솔하는 의병 30명과 만나 동대와 합동을 도모하여 김봉기로부터 총 10정을 빌리고, 또 그 소대장인 이천명(李千明)에게 400원을 주고 총의 매입을 부탁, 인천 사는 이순서(李順西)란 자로부터 모젤 총 5정을 매입한 일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66~267쪽)

이 보고서를 보면, 지홍윤은 15년 동안 강화진위대에 근무한 후 교동군(현 강화군 속면)에서 상업을 했으며, 1908년 4, 5월경부터 의병투쟁에 나섰고, 처음에는 장인선 의진의 소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장 의병장이 피체되자 그 의진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 강화지역에서의 의병투쟁
강화도에서 지홍윤의 의병투쟁에 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08년 4월 이후인데, 그는 김용기, 박계석(朴啓石), 심노술(沈魯述), 연기우(延基羽), 이능권(李能權) 의진과 연계하기도 하였다. 편제상으로는 김용기가 총대장이었고, 심노술이 부대장, 그는 박계석과 함께 김용기 의진의 중대장 또는 별장(別將)으로 활약하였다. 일제의 기록을 보면, 그는 배를 이용하여 강화도는 물론, 강화지역 석모도 등의 섬 지역과 황해도 배천·연안 지역을 오가며 의병투쟁을 벌인 기록이 수차례 나타난다. 그가 김용기, 연기우 의병장과 같은 날 의병투쟁을 벌인 기록도 보인다.

"(1908년) 10월24일 약 80명의 적이 경기도 강화군 북사면(北寺面)에 내습한 건을 10월29일 '한헌경을(韓憲警乙) 제1246호'로써 통보한 바, 그 후의 정보에 의하면, 한 번 승선(乘船) 도주한 적은 26일 재차 내습, 수괴 김봉기는 부하 35명을 인솔하고 동군 간점면(良站面) 부근, 지홍일은 부하 30명을 인솔하고 동군 상도면(上道面) 부근, 연기호(延基鎬:연기우延基羽의 이명-필자 주)는 부하 15명을 인솔하고 동군 내가면(內可面) 방향으로 나눠 각각 금품을 약탈하고, 또 2명 내지 3명의 적이 한 무리가 되어 동군 선원면(仙源面)·길상면(吉祥面) 부근을 배회하여 금품을 강청 중이라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185쪽)

"지금 폭도에 가담하고 있는 자는 강화도 전체에서 80명가량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홍일의 부하 27명, 이능곤(李能坤:이능권의 이명-필자 주)의 부하 38명, 박계석의 부하 20명가량은 총기를 갖지 않고 사역(使役)을 하고 있는 자가 있어서 그런 자가 얼마인지 모른다. 어느 부대도 폭도의 복장은 다갈색의 양복식으로 약간 붉은색을 띠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10쪽)

◆ 지홍윤의 행적과 공훈록
강화의병은 1907년 8월9일 강화분견대 봉기로부터 시작되어 그 해 엄청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지홍일 의병장은 자신이 의병에 참여한 시기를 1908년 4월이라고 진술하였다. 이것은 모든 행적을 진술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우려가 있어 가급적 진술하지 않으려는 여느 의병장처럼 종전의 행적을 진술하지 않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907년 8월부터 1910년 8월까지 3년 동안 의병과 관련된 1만여 건의 문서를 122권의 책으로 엮은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강화분견대 봉기에 관한 것은 한 건도 없다. 그 이유를 '강화분견대 봉기의 주역 유명규 의병장' 편에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Ⅱ권 '한국광복군소사'(1943)에는 66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공적이 담겼는데, 지홍윤은 군대 해산에 반발, 자결한 박승환(朴昇煥)에 이어 19번째로 소개될 만큼 훌륭한 인물로 기록하였다. 이 책에는 지홍윤이 강화분견대가 해산된 다음날부터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는 기록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일본군에 피체되어 진술한 내용과 많은 차이가 있다.

"지홍윤. 강화진위대 부교였고,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였습니다. 국방군 해산령이 내려진 다음날 휘하를 이끌고 기의하여 일군 1개 중대를 격살하였습니다. 이어 제물포 지역을 전전하며 여러 차례 일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일군이 병력을 증강시켜 강화도를 점령하자 휘하를 이끌고 해서로 근거지를 옮기고 민군을 모집하여 재차 활동을 도모하였습니다. 많은 현상금을 내건 일군에 의해 체포된 뒤 사형되었습니다."

지홍윤 의병장은 피체된 후 재판을 받은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교수형으로 순국했는지, 자결했는지, 고문으로 인해 순국했는지, 유명규 의병장처럼 일본군에 항거하다가 피살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국가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9권(1991)에는 그가 1907년 8월9일 의병을 일으켜서 강화도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해서(海西) 지방으로 나아가 재거(再擧)를 계획했으나 밀정의 밀고로 붙잡혀 1909년 9월1일 옥중 순국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가 황해도 지역에서 이진룡(李鎭龍), 이근수(李根守) 의진과 연합하여 명성을 떨친 내용은 없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를 포함, 고작 세 문장뿐이니, 참으로 잘못된 기술이라 하겠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