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서 있는 모든 것은 눕고 싶어 한다. 맞는 말이다. 불안이다.
서 있는 모든 것은 누울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중력이다.

불안에 시달리다가 중력으로 끝난다.

'서 있는 것'과 '눕는 것' 사이의 성찰이랄까. 그것을 '삶'과 '죽음'으로 대치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인생'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그러니까 불안하게 서 있다가 결국 눕는 것으로 끝나 버리니까. 이 시에서 시인이 "서 있는 모든 것은 눕고 싶어 한다. 맞는 말이다. 불안이다"라고 한 것은 역설적이다. 그것이 역설적인 것은 '눕고 싶어' 하는 것의 추동력이 '불안'이 아니라 '누울 수 없게 하는 것'이 '불안'이기 때문이다.

서 있는 모든 것은 눕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실 누워 있어도 다시 서 있어야만 하는 시대가 '현대'가 아닌가. 그래서 서 있는 것은 저항적이며 영웅적이다. 서 있는 것이 삶이라면, 삶은 고단하고 수고롭다. 그러나 눕고 싶지만 누울 수 없게 하는 것,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은 '불안' 때문이다. 불안은 마치 중력에 의해 '눕는 것'처럼 '죽음' 혹은 '절망'의 징표로 드러나지만, 사실 '불안'은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다. 절망은 힘듦과 어려움이 아니라 앞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함에서 생겨난다. 이 상태가 극복되리라는 믿음이 사라질 때 절망은 피어오른다. 불안도 마찬가지로 불투명하다. 불안은 무(無)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정서이다.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지고 절망에 가까워진다. 때문에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은 불안을 껴안고 불안을 즐기는 것뿐이다. 불안은 삶의 생기(生氣)를 불러일으키는 무한한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서 있고 싶은가. 불안을 회피하지 말고 즐기자.

/강동우 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