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살리려고 어머니 북으로, 다시 남으로 왔지만 연좌제 굴레
인천서 결혼과 40여년 목회 활동, 이산가족상봉 아버지 소식 들어
교통사고로 떠난 큰 아들 보상금, 중국 중선소학교 건립 전액 기부
북한 개성 배나무 농장 건설 합의, 사업위해 '남북평화재단' 만들어
강화도 외포리 산자락에 사재로, 은퇴 뒤 소망 '평화의집' 공사중
▲ 평화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남북 평화재단 김의중 목사가 재단 사무실에서 자신의 인생과 '평화의 집' 사업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건립 중인 '평화의 집' 전경. 오는 4월 준공을 목표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 큰 길 건너편, 야트막한 산자락 아래에서는 오는 4월 완공을 앞둔 2층짜리 석조건물이 마무리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평화운동'에 평생을 바쳐온 김의중(72) 목사가 사재를 털어 짓고 있는 '평화의 집' 공사 현장이다. 300평 대지 위에 70평 규모로 세워지는 '평화의 집'에는 작은 전시관과 교육장,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들이 들어설 예정이다.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시민들이면 누구든 '부담 없이' 쉬어갈 수 있는 휴식 공간도 한쪽에 마련된다.

 
 '평화의 집'을 짓겠다는 구상은 김 목사의 오랜 소망이었다. 은퇴한 이후의 사업으로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소박한 바람이었다. 지난 2018년 4월, 40년간의 목회활동을 마감한 김 목사는 집터를 찾느라, 전국의 여러 곳을 둘러봤다고 한다. 그러나 '운명'에 이끌린 듯, 결국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마을인 강화도 내가면 오상리 언덕 너머에 자리를 잡게 됐다.

 
'평화의 집'이 들어서는 외포리 선착장은 김 목사의 삶과 뗄 수 없는 '질긴' 인연의 장소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고향을 등진 곳이고, 그 탓에 4살 코흘리개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이북으로 향하던 자리였다. 그 곳에서 하나 뿐인 형을 잃고 어머니는 교도소로 끌려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런 곡절을 거치며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연좌제'의 굴레에 갇혀 천형(天刑)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40년간의 치열한 목회자의 삶과 지치지 않는 평화운동을 펼친 끝에, 남북은 물론 중국정부까지 인정하는 대표적 '평화운동가'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2016년과 2018년에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성화전시회를 갖고, 지난해에는 200여 편의 시를 엮어낸 시집을 펴내는 등 화가와 시인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6.25 전쟁의 상흔과 연좌제의 그늘, 이를 극복하려는 몸부림, 중국과 북한지원을 통한 '평화운동' 등 그의 일생을 관통한 고뇌와 좌절, 성취와 희망은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어떤 소설이나 영화로도 표현하기 힘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김 목사의 일생을 그의 잔잔한 육성과 관련 자료를 통해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고난으로 점철된 유년기와 청년 시절>
 
- 고향 강화도 내가면 오상리

김 목사는 1947년 9월 11일 외포리 선착장에서 멀지 않은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성뒤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0년생인 아버지 김용백 씨는 서울의 경성전기학교를 졸업한 당시의 엘리트였다. 중국에서 유학을 한 아버지는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이 그랬듯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아버지는 제헌의회가 소집되던 1948년 체포돼 2년여 간 수감생활을 마친 뒤 북으로 넘어갔고 연락도 끊어졌다.

사회운동에 매달려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단 한번 집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태어난 김 목사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평생을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살아가야 했다.
 
- 자식을 살리기 위해 월북을 선택한 어머니

1950년 6월 25일 난데없는 전쟁이 터졌다. 승승장구 남하하던 북한군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패퇴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북진은 월북 인사가 있는 집안에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다. '공산주의 가족은 죽임을 당한다'는 소문은 자식을 지켜야 했던 어머니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서둘러 열여덟이던 형과 네 살배기 꼬마 김의중의 손목을 잡고 아무런 채비도 없이 한걸음에 외포리 선착장으로 내달렸다. 선착장에는 여자와 남자를 구분한 배 두 척이 있었고, 어머니의 손에 매달린 둘째와 큰 아들은 서로 다른 배에 올랐다.

 
- 고향으로 되돌아 온 월북자 가족
황해도 연백에 내린 가족은 서로를 찾아볼 경황도 없이 5일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의 하늘에서는 미군의 폭격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를 피해 숨고 뛰기를 반복하는 사이, 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넋을 잃은 어머니는 '언젠가는 아들이 고향집을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 끝에, 가던 길을 되돌아 몇날 며칠간의 동냥질과 노숙 끝에 임진강을 건너 오상리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월북자를 색출하는 경찰이었다. 어머니는 곧바로 체포돼 짐승 취급을 당하며 2년간 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어린 김 목사는 어머니 품에서 떨어진 2년여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밤새 울었다고 한다.
 

- 가족을 덮친 '연좌제'의 굴레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김 목사 가족에게 남은 건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의 굴레였다. 범죄자와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지우는 '연좌제'는 한 세기 이전인 1896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지만, 군사독재정부는 이를 계속 악용했다.

반공이 국시였던 당시에는 이보다 무섭고 가혹한 말이 없었다. 김 목사는 "가장 처절하고 비참하며 힘없게 만드는 불행한 이름이 빨갱이였다"고 회고한다. 경찰은 시도 때도 없이 집안에 쳐들어와 어머니를 다그쳤다. 이웃은 물론 주변 친척들까지 화를 입을까 두려워 가까이 하기를 꺼렸다.

 
- 미래를 잃은 강화도 촌놈

어린 김의중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형사들이 학교에 찾아와 "너희 아버지는 빨갱이다, 공부해도 소용없고 군대도 못 간다,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나 하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학교 선생님과 동급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강화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으로 건너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강화도 촌놈, 뻔뻔이'라는 놀림에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이 더해졌다. 따돌림과 욕설, 모욕은 일상이었고 또래들의 몰매도 견뎌내야 했다.

김의중 목사


<목회자로서의 새로운 삶>


- 절망을 벗어나기 위한 그리스도교 선택

 이 때 어머니는 '더 이상 집안이 망해서도, 불행해서도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아들 김의중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에 있는 오상감리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늘 상 "너는 커서 나 같은 과부, 너 같은 고아 같이 외로운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라"고 당부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교회에 심취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교 3학년을 다니던 도중, 신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하고 대전신학대학교로 편입절차를 마쳐놓았다. 젊은 시절 연탄집게로 팔뚝에 십자가를 새길 만큼 신앙에 몰두했던 김 목사도 어머니의 뜻에 따라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 목회 활동과 결혼, 연좌제 폐지

첫 목회지는 경기도 안성 공도감리교회였다. 그 때 아들을 따라 안성으로 옮겨온 어머니는 시골집과 논·밭을 팔아 마련한 쌈짓돈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73년 계양구 귤현교회로 옮겨 전도사로 근무 중이던 1976년, 지인의 소개로 5살 연하인 박귀엽 여사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뤘다. 당시 박 여사는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사회복지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김 목사는 "당시 아내는 내가 연좌제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결혼했지, 그렇다고 일부러 속인 건 아니야"라며 농담을 던진다.

그의 뼈 속 깊숙한 상처로 남아 있던 '연좌제'는 역설적이게도 전두환 군사정부 때인 1981년 3월 25일 폐지됐다. 33년간의 지옥 같은 굴레가 기적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김 목사는 "최소한 연좌제 폐지에 대해서는 전두환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었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 55년 만에 접한 아버지 소식
그에게 '빨갱이 자식'이라는 한 맺힌 꼬리표를 달아주었던 아버지의 소식은 2005년 이산가족 상봉 때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6.25 헤어진 형을 찾기 위해 상봉신청서를 낸 김 목사는 적십자사로부터 뜻하지 않은 연락을 받았다. 형의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그해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12차 이산가족상봉행사에서 북에서 살고 있는 형수와 큰 손자를 만났다. 하지만 형은 66세로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월북 이후 북한군 장성을 지내다 전쟁 도중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때 어머니 한산림 여사는 100세를 넘긴 고령이었다. 남편과 전쟁 통에 잃어버린 큰 아들의 소식을 55년 만에 접한 것이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모진 삶을 이겨온 어머니는 지난 2009년, 104세의 나이로 소천 하셨다.

 
- 작전동 교회에서의 목회활동
1977년 3월 김의중 담임전도사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일 년 뒤인 1978년 3월, 부평공단 작전동 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부평공단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김 목사는 산업선교회 이사장을 맡아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야간 학교인 신정학교도 설립했다.

맞벌이 부부를 위한 무료 유치원을 개원하고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영어 예배시간도 마련했다. 1985년에는 방산복지재단을 설립해 노인과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사업과 무료급식사업을 벌여나갔다.
 

<중국동포 지원 사업>

김의중 목사

- 중국복지후원회 창립

부평공단 목회에 심취하던 1980년 후반에는 중국 동북삼성 쪽에서 넘어오는 조선족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교회를 찾아와 급료나 건강, 자녀문제를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김 목사는 여기에 눈을 돌려 중국과 북한 지원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최초의 결실은 중국 지원에 관심을 갖고 있던 김 목사 일행이 1992년 12월 중국 길림성 연길시를 방문한 때 맺어졌다. 김 목사는 연길시 민정국, 흥안향 정부와 '연변사회복지센터 건립을 위한 합동서를 교환했다.

중국 흥안향 실현촌 3만3000평 대지 위에 장애자 재활을 위한 120평 규모의 시범관을 짓기로 한 것이다.

그 다음해인 1993년 4월 복지센터 설립 합의서 조인을 계기로, 그해 6월 4일 김 목사의 '필생의 사업'인 중국복지후원회가 창립됐다. 후원회 회장은 당연하게도 김 목사가 맡아 사업을 이끌었다.
 
- 큰 아들 선균의 사망
중국복지후원 사업이 본 괘도에 오를 즈음인 1995년 10월, 김 목사 가족은 또 하나의 커다란 불행이 몰아닥쳤다. 5년 만에 얻은 첫 아들이 독서실에서 돌아오던 도중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것이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14살의 선균은 "주일에 교회를 가야 한다"는 아빠의 말을 듣곤, 친구 집에서 자려던 생각을 접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던 길이었다. 김 목사는 더 이상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한다.


- 흥안진 경로원 건축과 운영 지원
중국복지후원회는 두 번째 사업으로 1996년 화재로 전소된 흥안향 경로원 건축사업에 들어갔다.

1억3천만 원을 들인 경로당은 97년 완공 이후 의란진 경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후원회는 현지에 인력을 보내 경로원 운영과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2002년부터는 항구적 자립을 위해 소 50마리를 구입해 지원하기도 했다.
 
- 북경 배나무 농장 건립
후원회 사업은 1998년 북경시 임업국과 희망공정 위원회 일행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희망공정은 중국 내 가난한 학생들의 학업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청소년발전기금이 민간 기부금을 모아 펼치는 사업이다.

이를 계기로 김 목사는 그해 11월 북경으로 날아가 회유현 학교 부지를 돌아봤다. 다음 달에는 김포시 배 연구회가 참석한 가운데 북경시 임업국과 3000평의 배나무 농장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99년 사업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금의 일부는 희망공정에 사용하기로 했다.

이때 시작한 북경의 배나무 농장은 이후 10년 간 33만㎡(10만 평)으로 늘어났으며, 북한 평양 배농장의 모태가 됐다.

 
- 중국에서 새 삶을 얻은 큰 아들
2000년 8월에는 희망공정의 일환으로 회유현에 소학교를 건립했다.

이 학교의 이름은 중선소학교. 중국의 '중'자와 5년 전 교통사고로 숨진 선균의 '선'자를 한 글자씩 모아 지은 이름이다. 김 목사는 선균의 사망보상금으로 받은 돈 전액을 이 학교 설립에 기부했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학교 이름이 지어졌다.

그동안 가슴에 묻어 놓았던 큰 아들은 이 학교를 통해 중국 땅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 학교는 2009년, 대지 3만평, 건평 3천 평 규모로 신축돼 발해중심소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 학교 안에 '한·중문화교육교류센터'를 설치했다. 양국 간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2012년 12월 인천시교육청의 지원 아래 인천 화전초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환방문, 양국 언어 교육 등을 이어가고 있다.

 
- 안도현 복지관 준공
북경에서 중선소학교가 완공식을 갖던 날, 연변자치주에서는 후원회가 추진하던 안도현 복지관이 준공됐다. 3만3000㎡(1만평) 부지 위에 350평의 종합사회복지관이 1년여 간의 지연 끝에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IMF 외환위기로 인해 모금이 불가능하던 현실을 극복해내고 이뤄낸 기적 같은 성과였다. 특히 복지관 준공식이 중선소학교 완공식과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열려 그 의미가 남달랐다. 여기에도 2005년부터 자립기반을 다지기 위한 육우 지원을 시작해 사육두수가 45마리까지 늘어났다.
 
- 체육과 음악, 기술 봉사활동
후원회는 금품기부와 시설지원에 그치지 않고 체육과 음악, 기술봉사활동도 병행했다.

2001년 창단한 축구선교단은 월드컵 열기가 미처 식지 않았던 2002년 9월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학생팀, 용정중학교 교사·학생팀과 경기를 치렀다. 2005년에는 연변과 도문, 훈춘, 심양으로 이어지는 순회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2009년에는 발해중심소학교에 어린이 축구클리닉을 개설하는 등 틈날 때마다 축구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음악 봉사팀은 2009년 9월 심양시 교외에 400평에 이르는 명성실용 음악학원을 건축했다.
 
-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중국복지후원회
중국복지후원회는 지금도 여전히 왕성한 중국지원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발간한 후원회보를 보면, 하북성 교회와 신학교, 의란진 경로원, 안도현 종합사회복지관, 북경 발해중심소학교 후원팀이 운영되고 있으며, 문화·축구 선교팀과 웨슬리 선교사 훈련원, 중앙지회, 평신도 후원회가 열성적 후원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김의중 목사

 <북한 지원사업>
 
- 북경 배나무 농장을 방문한 북한 시찰단
 김 목사가 중국복지후원회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벌인 가장 큰 목적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총부리를 서로 겨누며 등지고 살고 있는 북한동포 지원에 있었다.

기회는 전혀 뜻하지 않은 가운데 찾아왔다. 북경 배나무 농장이 자리를 잡아가던 2002년, 중국을 방문한 북한 경제시찰단이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북한 시찰단은 중국 관리들에게 '전 국토의 70~80%가 농촌인 북한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선진농업단지를 소개해 달라고 의뢰했다. 그 때 중국 관리들이 시찰단을 데리고 간 곳이 북경의 배나무 농장이었다.

이 농장이 남한의 김의중 목사 도움으로 조성됐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시찰단은 그 해 12월 조선 그리스도교연맹 위원장 명의로 초청장을 보내왔다. 김 목사는 통일부 인도지원국의 접촉승인을 받아 2003년과 2004년 북경에서 조선 그리스도연맹 선전부장과 북한 농업담당자 등과 회담을 가졌다.

 
- 평양 배 농장 조성 사업에 합의
북한은 그 때 이미 평양 인근에 배 농장과 소 농장, 지렁이 농장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평양 초청장까지 마련한 상태였다. 하지만 남한 정부가 이 사업에 관여하는 것을 꺼린 북한과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불발되고 말았다.

4년여가 흐른 2008년 2월, 북한은 민족경제연합회 명의로 개성에서 회담을 하자는 제안을 보내왔다. 김 목사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개성에 들어가 배 농장 조성을 위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을 통해 5년에 걸쳐 평양 대성구역에 10만 평 규모의 배 농장을 건설하자는 역사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출범
이 사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다. 김 목사는 평양 배농장 건설을 계기로 인천시와 경기도 주민들이 정파와 종교, 신분을 넘어서 한 마음으로 북한동포를 지원할 것을 제안했다.

 뜻을 함께한 지역의 유력인사들은 개성합의 직전인 2008년 2월, 남북평화재단의 양해 아래 경인본부를 설립하고 김 목사를 상임대표로 선임했다. 본부 사무소는 중국복지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간석동 새마을금고 3층에 설치했다. 이때부터 중국복지후원회가 활동하던 방식으로 북한지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 물꼬를 튼 대북지원 활동
남북이 평양 배나무 농장 건설 사업에 합의한 직후인 2008년 4월 16일, 경인본부 회원 80여명이 개성을 방문했다. 그해 11월 27일에는 1단계 사업으로 '배나무 묘목 1주 보내기 운동'을 통해 모인 묘목 5000주와 비료 2000포대가 보내졌다. 이에 앞선 8월에는 '북한 동포 겨울옷 보내기'가 진행돼 1만3000벌의 옷가지가 북측에 전달됐다.

문화교류도 이어졌다. 2009년에는 부평구청과 계양구 아트홀에서 북한 인민화가 작품 150점을 전시한 '북, 푸른 산하 만들기를 위한 북한 미술전시회'가 열렸다. 다음해인 2009년에는 묘목 1만주와 비료 3000포대, 2010년에는 묘목 1만5000천주와 비료 3000포대 보내기가 계획돼 있었다.
 

- 5·24 대북제재 조치 이후에도 계속된 대북지원
하지만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남북간 교류가 일순 얼어붙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는 5·24 대북제재 조치를 발표했고, 남북 민간교류까지 중단됐다. 그렇다고 그대로 손을 놓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2010년 7월 송영길 인천시장 취임에 힘을 입어 그해 9월 18일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명의로 '북한 평양산원 영유아 및 산모지원 사업'을 진행했다. 5·24 조치 이후 처음 있는 대북 물품지원이었다. 2012년에는 전기사정이 좋지 않은 북한의 학생들을 위해 1만개 '자가 랜턴' 보내기운동을 펼쳤다.
 

- 인천 아시안게임 공동응원단 추진
2014년 9월 19일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개최됐다. 김 목사는 아시안게임 남북교류분과 위원장에 임명돼 북한 선수단 초청과 공동 응원단 구성을 추진했다. 하지만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북측 응원단이 불참하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남북평화재단은 북한응원단을 만들어 남녀 축구경기를 응원했고, 그 덕분에 폐막식 때 북한 최고 지도자 3인이 내한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종교인 평화음악제 개최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는 남북 평화와 종교간 화합을 기원하는 종교인 평화음악제를 2013년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한 이후인 2016년 11월에도 불교 흥륜사, 인천 가톨릭, 효성중앙교회 등 3개 종단 합창단이 모두 참석한 제2회 행사를 개최했다. 2017년과 2018년에도 이 행사는 계속됐고 2019년에는 '인천평화음악회'로 이름을 바꿔 '평화의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 북한 나무심기 운동
요즘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업은 북한 나무심기 사업이다. 인천과 남포 간 교류 재개를 대비해 남포지역 학교 주변 나무심기, 나선지역 사과나무 심기 사업 추진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북한과 몽골 등 동북아 지역의 황폐화한 산림을 복구하는 국제회의에도 정성을 쏟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북미관계 악화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 인천평화도시 조성위원회
최근 새로 어깨에 짊어진 과제는 인천을 평화도시로 만들기 위해 구성된 '인천평화도시 조성사업'이다. 그는 지난해 2월 구성된 조성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남북교류협력사업 기반조성 ▲평화도시 인천 확산 ▲민관협력 네트워크 구축 ▲인천형 남북교류 협력사업 ▲통일 공감대 형성을 위한 시민들과의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돌아온 아들 이야기'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김의중 작전동감리교회 목사
▲ '돌아온 아들 이야기'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김의중 작전동감리교회 목사

 

▲ 김의중 作 "기도하는 예수"

 

<에필로그, 시를 쓰고 그림 그리는 목회자>


- 남북 민간교류 대통령상 수상
김 목사는 지난 2017년 11월 20일, 민간부문 남북교류 유공자로 선정돼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대북지원 활동가로서 ▲북한 농장지원 ▲종자보급 ▲산림복구 분유지원 ▲2014 인천아시안게임 북한공동응원단 추진 등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당시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꾸준한 지원활동과 대화의 길을 모색해, 한반도 통일을 위한 마중물이 되겠다"고 말했다

 

 
- 예수의 모습을 그리는 화가
지난 2016년 '예수 성화전시회'를 열었다. 청년 시절인 1966년과 67년 교회학생들을 위해 제작했던 '성경 이야기'와 목회생활 도중 틈틈이 그렸던 성화, 자신의 고백적 삶을 그린 '돌아온 아들 이야기 시리즈'를 모은 작품전이었다. 그림집으로 출판된 '돌아온 아들 이야기'는 2000년도 초 감리회 본부가 추진한 300만 전도지로 활용됐고, 외국어로도 번역돼 외국에서 전도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은퇴 직전인 2018년 1월에도 온누리 감리교회 스페로갤러리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
지난해 9월에는 자작시 200여 편을 수록한 시집 '희망의 나루터'를 발간했다. 그는 마지막 시 '평화 소원'에서 "평화는 영원한 생명, 오늘도 한 그루 평화의 나무를 심는다"라고 노래했다. 김 목사는 인터뷰 말미에 "나는 진보나 노동, 통일을 앞세우는 운동가가 아닙니다, 나는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19년 12월 31일자 '중국복지후원회 회보'를 건넸다. "중국복지후원회는 중국과 북한의 복지 후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김 목사와의 길고긴 인터뷰는 "이 얘기를 기사에 '꼭' 써 달라"는 당부의 말로 끝을 맺었다.

 

/정찬흥 기자 report61@incheonilbo.com

 



 

김의중 목사 약력

·1947년 강화도 내가면 오상리 출생
·내가초등학교, 인천 남중, 선인고등학교 졸업
·1973년 목원대학교 신학과 졸업
·1977년 작전동 감리교회 목사 부임
·1993년 중국복지후원회 설립
·2008년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설립
·2018년 작전동 교회 목회 활동 은퇴
·2018년 ~ 현재 인천평화도시 조성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