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트루먼 행정부는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을 통해서 1951년 6월30일 공산군측에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리지웨이는 7월10일 개성의 내봉장에서 첫 회담이 열린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회담경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한국국민들에게 사망보증서나 다름없는 38선을 유지하는 휴전에 동의할 수 없고 북진통일만이 우리의 염원'이라는 친서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트루먼은 한국에서 휴전 반대운동이 계속해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 대통령에게 협조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계속해서 "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한국군에 대한 확실한 증강계획 없이는 휴전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맞섰다. 당시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과의 방위조약 체결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트루먼에게 건의했다. ▶한국전쟁을 조속히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휴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는 비밀작전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아이젠하워는 상호방위조약 대신 미국정부의 한국방어 성명과 10억달러 경제원조도 제시했으나 이승만은 상호방위조약을 재차 요구했다. 이승만을 '정신착란자'로 격렬하게 비난한 아이젠하워는 드디어 이 대통령을 축출하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을 시행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1953년 5월29일 국무부와 합참연석회의에서 미국정부 특사로 이승만과 휴전회담을 협상했던 월터 S.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는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정부를 인수하느냐? 정말 우리 자신을 침략자 입장으로 몰고 싶은가?"라고 강력하게 반대해 이승만 제거대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결론남으로써 에버레디 작전은 폐기되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이 대통령과의 힘든 협상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능케한 한미동맹은 국민의 피와 염원을 귀중하게 받들던 유능한 지도자의 탁월한 외교력과 필사적 투쟁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애국심과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을 높이 평가한 로버트슨 차관보의 양심과 결단도 결정적이었다. 6·25 전쟁 70년이 되는 오늘날 한미동맹의 가치와 혈맹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이승만 대통령과 힘든 협상을 통해서 오늘의 한국을 가능케한 월터 S.로버트슨을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었다. 만시지탄이 있지만 그의 행적을 소상히 밝혀내고 추모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의 사명일 것이다.

언론인 신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