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은 적 없는 아이들 이해하고 기다려줘야"
▲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일생을 헌신해온 허보록 신부가 자신이 돌보는 아이와 함께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90년 사제 서품받아 안동서 돌봄 첫발…99년 '성요한의집' 열어 400명 돌봐
"제가 없어도 시설 후원 계속해주길…아프지 않고 죽어 한국에 묻혔으면"



"소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학생들과 사회복지사 모두 자기 자리와 자기 시간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군포시 당동 주택가에 자리 잡은 4층짜리 다갈색 벽돌 건물 옥탑방에 들어서자 강아지 한 마리가 반갑게 꼬리를 흔든다. 이어 책상에 앉아 있던 서양인 사제가 "안녕하세요"라며 유창한 한국어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프랑스 출신의 허보록(필립보) 신부다.

허 신부는 군포시 불우 청소년의 대부로 꼽힌다. 1999년 5월 오갈 데 없고 돌보는 이 없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2층 단독주택에 성요한의집을 열었다. 처음에는 30명 가까이 데리고 살았으나 7명까지만 수용할 수 있는 관련 규정에 따라 5년 뒤 4층 건물을 지어 성야고보의집을 따로 차렸다. 4층 성요한의집에는 초등학생, 3층 성야고보의집에는 중고등학생이 7명씩 살며 형제처럼 지낸다. 10년 전에는 과천시에 성베드로의집을 마련했다.

허 신부는 1990년 10월21일 처음 한국에 왔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선교사 단체로 이 단체에 들어가게 되면 대부분 동양에 파견된다고 한다. 1658년 창립된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선교에 앞장서며 지금까지 40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1831년 조선 초대 주교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중국에서 숨을 거뒀다. 1836년 모방 신부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이래 24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1984년 성인품에 오른 103위 가운데 10명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다. 지금도 허 신부를 포함해 9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다.

허 신부는 1990년 6월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한국에 왔다. 한국 문화와 역사를 잘 몰랐던 허 신부는 한국행을 알게 된 후부터 한국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32살에 한국에 온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을 사랑했던 것 같다고 소회했다.

한국에 와서 처음 8년간은 안동교구에서 있었다. 안동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있을 당시 그의 일생에 변화를 줄 중요한 일이 생겼다.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던 안동교구에서 어린이 5명이 학교에 갈 시간에 와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에 씻지 않아서 냄새까지 나던 아이들이 허 신부는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헤어지기 전에 어린이들에게 갈데없으면 다시 오라고 말을 전했다고 한다. 저녁 미사를 마치고 사제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린이들이 성당 뒷문에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신부님과 주교님의 허락을 받고 다섯 아이의 집을 만들면서 아이들을 돌봤다. 그것이 불우한 아이들을 돌보는 긴 여정의 된 시작이었다.

슬픈 일도 있었다. 20년간 교도소에 있다 모범수로 나온 봉사자 한 명이 아이들에게 폭력을 쓴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이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어린이들도 다치고 허 신부도 흉기에 찔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일로 프랑스로 돌아간 허 신부는 1년 뒤 다시 한국에 왔지만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된다. 군포였다.

허 신부는 "수원교구 최덕기 주교님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일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군포 성요한의집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1999년의 일이었다.

"아이들의 사연은 모두 기구하기 짝이 없어요.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거나 가정이 깨지는 등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상처가 깊습니다. 사랑받은 적이 없으니 사랑할 줄도 모르죠.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해야죠. 이들이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성요한의집은 가톨릭 시설이다.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만들어 줬고 시청에서도 검사하고 감사도 한다. 물론 정부의 지원도 받는다.

허 신부는 "지난해 20주년 행사가 있었는데 그간 400여명 정도가 이 시설을 거쳐 갔다"면서 "2년 전에 결혼한 친구도 있었고 올해도 4월에 한 친구가 결혼한다. 외국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고 군대에 있는 친구들도 있다"고 미소 지었다.

올해 한국 나이로 62살인 허 신부는 조금씩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나중에 제가 없을 수도 있고 병으로 죽거나 사고가 날 수도 있잖아요. 제가 영원히 살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래서 계속 준비하고 있어요. 결손가족 어린이가 없다면 이 시설은 없어져요. 문제는 그런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본인이 없더라도 시설이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다.

"여유가 있는 주변 분들이 어린이들에게 1, 2만원이라도 후원을 계속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아이들이 맘 편히 지내다가 시설을 떠난 후 자립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시설이 어려움을 겪었을 때 허 신부는 공장일까지 알아보았다고 한다. 일하는 것을 결정했을 당시 좋은 후원자를 우연히 만나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지금은 평일에 미사를 집전하고 양로원도 찾고 새터민들도 만난다. 시설을 떠난 이들을 상담하고 취직을 시켜주고 사회복지사의 교육도 그의 몫이다.

하지만 성요한의집을 떠난 아이들이 모두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성요한의집에서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한 학생을 허 신부가 한 달 전에 안산에서 만났는데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상처입지 않게 도와주고 안산에서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소개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항상 기도한다.

"우리 사랑하는 한국 사람들 너무 사랑하니까 저는 죽어도 한국에 묻히고 싶어요. 물론 큰 병에 걸리거나 한다면 프랑스로 다시 갈 수도 있어요. 사랑하는 한국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죠. 아프지 않고 한국에서 죽고 싶어요."

 


 
허보록 신부는…

 

▲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일생을 헌신해온 허보록 신부가 인천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일생을 헌신해온 허보록 신부가 인천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1959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의 천주교 신앙은 독실했지만 성직자를 배출한 집안은 아니었다. 허 신부도 10대 때는 운동과 팝송을 좋아하는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1975년 남베트남 정권 패망을 전후해 '보트 피플'(Boat People)로 불리는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지의 난민이 노르망디로 많이 이주했다. 허 신부의 부모는 이들을 헌신적으로 도왔고, 자녀들도 아이들과 놀아주고 프랑스어도 가르쳤다.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봉사의 기쁨을 맛봤고 신앙심도 깊어졌다. 그를 성직자의 길로 이끈 것은 테레사 수녀였다.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그의 행적을 접하고 허 신부도 한평생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겠다고 결심했다.

허 신부는 프랑스 캉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84년 로마 그레고리아나 신학대에 입학했다. 1986년 파리외방전교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1990년 6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은 후 한국에 왔다. 1999년 군포에 성요한의집을 만들었다.

/오석균 기자 demol@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