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뻗은 뱃길은 세계로 … 무려 130년 전부터

 

 

▲ 개항직전 제물포항에 정박 중인 서양기선

 

▲ 오늘날의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일본,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 개항
자국 기선회사끼리 경쟁 막고자
'일본우선주식회사'로 통합시켜
인천 점유율 낮았으나 독점적 우위
청국·러시아서 인천항로 열 준비하자
나가사키 해운망 '조선 중심'으로 개편





1880년대 무렵까지 아시아 간 무역은 주로 정크선들의 무역이었으며, 근대적인 항로망은 아직 요람기에 있었다. 이후 구미로부터 수입된 근대 해운의 기술력은 아시아 간의 교통망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기선의 운용과 정기항로의 개설은 서구의 동아시아 진출뿐만 아니라 청·일 양국의 조선 진출을 뒷받침하는 물리적 토대였다. 정기해운은 그 신속성과 정기성으로 외교·무역의 확대, 육해군의 활동, 식민지 경영까지 가능케 하는 것이다. 국제기선항로를 통해 연결된 각 지역 간의 주요 기점은 인적·물적 교류의 창구였던 개항장이었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국가의 경계를 넘어 문물이 오고갔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부산의 초량을 개항하고 바로 그해 11월 미쓰비시(三菱)기선회사는 나가사키와 쓰시마, 부산을 연결하는 우편선로를 달마다 정기 운항하였다. 1880년 3월부터는 화객이 증가하자 항해 및 정박일수를 단축하여 월 2~3회 비율로 운항하였다. 또 이 무렵 기존의 나가사키~부산 항로를 원산까지 연장하여 원산의 개항을 준비했고, 1881년 2월 고베~부산~원산~블라디보스토크 항로를 월 1회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1881년 5월 미쓰비시는 인천으로 향하는 우편선로를 개설하여 연 2회 우편선을 띄우기 시작하였고, 일본공사관의 공적인 연락을 위하여 군함을 매달 2회 왕복 운항하였으나 민간인의 이용은 어려웠다.

개항 직전인 1882년 10월 일본정부와 기선회사가 새로운 인천항로 개설을 논의했으나 항해보조금 문제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자 1883년 8월 영국계 이화양행(Jardine Matheson Co.)이 '상하이~부산~인천~나가사키' 간 정기항로를 개설하여 매달 2회 운항하면서 화객을 수송하고 조선정부로부터 세곡수송 특권까지 얻게 되었다. 이화양행 외에도 청국의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독일의 세창양행이 상하이~인천간 정기항로를 개설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항로를 폐지하였다.

일본정부는 자국 기선회사들끼리의 경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회사의 통합을 유도하여 거대 기선회사인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를 1885년 9월 출범시켰다. 그리고 보조금까지 지급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정치,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기항로를 개척하였다. 이렇게 하여 1886년 3월 '나가사키~인천~옌타이~톈진' 항로가 새로 개설되었다. 청국 및 구미해운의 인천항로 개설로 개항 초기 3년간 일본은 부산, 원산과 달리 인천에서는 평균 58%의 낮은 점유율을 보이다가 새로 설립된 일본우선회사의 항로 개설과 타국 회사의 인천항로 폐지로 말미암아 1886~87년간은 8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며 독점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내 청국 윤선초상국이 상하이~인천 항로를 재개설하고 러시아 기선회사도 항로 개설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일본우선회사는 기존의 '나가사키~인천~옌타이~톈진' 항로를 증편한 후 발선지를 나가사키에서 고베로 바꾸고, 1889년 '상하이~옌타이~인천~부산~원산~블라디보스토크' 항로를 신설했다. 이로써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 개항장을 연결하고 있었던 해운망은 '부산~일본, 원산~블라디보스토크, 인천~화베이·상하이'를 연결하는 조선의 개항장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들어오는 중계무역은 점차 쇠퇴하고, 청국으로부터 직접 들어오는 수입무역은 흥성하게 되었다. 특기할 것은 제물포 개항장에는 조선의 다른 개항장과 달리 조선인 해운업의 발전이 현저했다는 점이다. 1885년 7월 전운서(轉運署)와 1893년 이운사(利運社)의 설립으로 제물포항의 조선선박 점유율은 한때 23%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알렌 선교사의 회고록에 담긴 '철로'로 이어진 한반도와 유럽]

 

 

▲ 알렌 선교사
▲ 알렌 선교사

 일본의 고베와 나가사키, 중국의 대련과 연결된 제물포 개항장의 국제적 네트워크는 호레이스 알렌(H. Allen)의 회고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의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은 25세의 나이인 1883년 의료와 선교활동을 위해 중국에 입국하였다가 아내의 출산과 선교의 어려움 등으로 1884년 7월20일 조선에 입국하였다.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24시간을 가면 지부(芝)나 뤼순(旅順) 또는 대련(大連)에 도착할 수 있으며, 대련에서 러시아인들이 부설한 기차를 타면 유럽에까지 갈 수가 있고, 또 기차 편으로 북경까지 갈 수도 있으며 거기에서 다시 중국인들이 부설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한구(漢口)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부터는 양자강을 따라 상해까지 내려가면 그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다. 좋은 계절을 만나 미국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서 다시 조선으로 갔다가 대련으로 건너가 북경과 상해를 지나 한구를 지나 양자강을 따라 홍콩·싱가포르·콜롬보를 거쳐 수에즈 운하로 간다면 매우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즐긴 가장 즐거웠던 여행은 러시아 기차를 타고 대련으로부터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페테르부르크와 저 너머까지 갔던 때였다. 요즈음에는 서울에서 일본인이 부설한 기차를 타고 조선의 북부 지방을 거쳐 러시아인들이 부설한 만주철도를 타면 여행하기 좋은 곳에 곧 이를 수가 있다. 따라서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에 이르기까지 대한해협을 지나는 잠시 동안의 뱃길을 제외한다면 요코하마나 도쿄로부터 배를 타지 않고서도 유럽의 어느 곳에라도 갈 수가 있다. (알렌, <조선견문기>, 집문당, 1999, 50쪽).

1880년대부터 20여년간 미국과 조선을 왕래하면서 활동했던 알렌의 위의 기술을 통해서 우리는 제물포가 중국의 지부, 대련, 뤼순, 상하이와 연결되고, 일본으로는 나가사키를 통하여 오사카, 요코하마로 이어지며 태평양 항로로 연결되어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벤쿠버까지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물포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로 열려 있었다. 1900년대 들어서는 해로와 이어진 철로를 통해서 중국대륙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서 유럽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남북 분단으로 막힌 해로와 함께 철로가 하루빨리 연결돼 유럽과 한반도가 활발하게 교류하는 날은 언제 오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