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5. 강화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 대장 이능권(하)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5. 강화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 대장 이능권(하)
  • 여승철
  • 승인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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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 깃발 들고 국권회복 매진하다 형장의 이슬로

 

▲이능권이 이끈 대동창의진 의병이 일본군에 심대한 피해를 입혔던 강화군 정족산성

 

강화분견대, 군대 해산에 맞서 봉기
갑곶 상륙 일본군 공격해 11명 사상


이능권, 이듬해 거의…300여명 모여
김수민 의진과 연합…전등사서 격전
무기 구매차 한성 갔다가 피체·순국
 

▲ 경기도 인천경찰서 미즈노(水野憲)가 이끈 일한순사대에 의해 한성(경성)에서 피체된 이능권(가운데).
▲ 경기도 인천경찰서 미즈노(水野憲)가 이끈 일한순사대에 의해 한성(경성)에서 피체된 이능권(가운데).

◆ 강화분견대 군인과 강화군민의 분노
강화분견대는 비교적 군기(軍紀)가 정립되고 기개가 넘쳤다. 군대 해산의 소식이 전해지자, 1907년 8월2일경 강화 전등사(傳燈寺)에는 강화진위대·강화분견대 전·현직 간부들이 비밀리 모여 일본군이 군대를 해산시키고자 온다면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강화분견대 해산 예정일인 8월11일보다 이틀 앞인 9일, 참교 유명규(劉明奎)는 병사 50명과 함께 강화분견대장이자 선임소대장 부위 민완식(閔完植)과 소대장 참위 민영락(閔泳洛)에게 무기를 내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무기고로 달려가 돌로 무기고를 파괴한 후 무기를 손에 넣었다.

"분견대장을 죽여라", "소대장을 죽이자"하고 외치는 소리에 민완식과 민영락은 달아났다. 강화분견대 병사들은 이날 오후 6시 주민 500여명의 호응을 얻어 강화분견대를 접수한 후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고, 이어 군아로 가서 강화 일진회의 총무이자 군수인 정경수(鄭景洙)를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도주한 후였다.

8월10일 오후 4시, 수원진위대 교관 고쿠라(小倉) 대위는 강화분견대 해산을 위해 오사키(大崎) 소위 이하 보병 1개 소대와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하고 갑곶에 상륙하려고 할 때 갑곶 동측 성벽에 잠복하고 있던 강화분견대 약 50명이 돌연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일본군 6명을 죽이고, 5명의 부상자를 내게 한 후 강화 동문쪽으로 향하였다. 이어 정경수가 영정포(領井浦)에서 오윤영(吳允榮) 의진에 의해 체포되고, 일진회 강화지부장 양학진(梁學鎭)도 붙잡혀 함께 동문 밖에서 총살하였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사령관은 보병 제14연대 1대대장 이카시(赤司) 소좌에게 2개 중대, 기관총 2정, 공병 1소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강화성 주변에는 일본군의 포화가 집중되자 무기와 탄환이 부족한 가운데 해산군인과 의병을 이끌던 의병장 연기우(延其羽)는 장단(長湍), 지홍윤(池洪允)은 해서방면으로 탈출하였고, 이능권은 오윤영과 함께 강화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편, 유명규는 통진으로 건너가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9월6일 피체되어 총살 순국된 후, 강화지역 의병은 이능권과 김용기(金龍基:일명 奉基)가 이끄는 의진으로 재편되었다. 김용기는 해주·평산 의병장이자 1907년 13도창의대진 교남창의대장을 맡았던 박정빈(朴正彬) 의진의 창의돌격장 출신으로 지홍윤과 함께 강화도에 들어왔다. 지홍윤은 박계석(朴啓石)과 함께 김용기 의진에서 중대장을 맡았고, 김귀봉(金貴奉)·김장석(金長石)·궉종석(宗石)·유학도(劉學道) 등이 50여명 규모의 분대를 이끄는 상황이 되었다.
 

▲ 1909년 12월2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의병장 이능권이 묻혀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의 묘.
▲ 1909년 12월2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의병장 이능권이 묻혀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의 묘.

◆ 이능권, '대동창의진' 대장에 올라
이런 상황 속에서 대규모 거의를 준비해 오던 이능권이 1908년 들어 의진을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이라 명명하고 국권회복의 기치를 들자, 몰려드는 의병이 해산군인을 포함해 300여명에 달했다.

'대동(大東)'이라는 명칭은 곧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인 즉,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이름인데, 그가 이 이름을 썼다는 것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고 본다.

광무황제는 1906년 전 선전관 유종환(兪宗煥)에게 육남소모장(六南召募將)을, 1907년 여름, 전 선전관 이강년(李康秊)에게 강원·경북·충북 3도 16군 40여 의진의 도체찰사로, 전 평리원 수반판사 이인영(李麟榮)에게 13도창의대진을 이끌라는 비밀조칙을 내린 바 있고, 호남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고광순(高光洵)에게 총리호남의병대장을, 의병을 일으키라는 비밀조칙을 받은 전해산(全海山)은 의진의 이름을 '대동창의진'이라 하고 호남 연합의진을 이끈 바 있기 때문이다.

이능권이 광무황제의 밀칙을 받은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가 헤이그특사 호위무관으로 발탁됐던 것으로 보아 그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강화도가 다시 의병으로 들끓게 되자 일제는 일본군경과 헌병보조원 등 400여명을 동원하여 매일같이 의병 진압에 나섰다. 이능권은 한성진공을 위해서 군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매하여 무장하고, 의진을 황해도 평산·연안, 경기도 장단 등지에 분산시켜 의병투쟁을 전개했는데, <매천야록>에는 그가 경기도 장단 고랑포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이 이채롭다.

1908년 10월 상순, 13도창의대진 안무장(安撫將)을 맡았던 김수민(金秀敏)이 의진을 이끌고 강화로 와서 의병투쟁을 전개했는데, 이때 이능권 의진과 연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일제는 용산에 있는 일본군 보병 제13연대 1소대 3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였는데, 이때 전등사에 있던 의병들은 접근해 오는 일본군과 1주야에 걸쳐 격전을 벌여 이들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혔다.

이능권 의진은 무기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호가의 자발적인 협조를 부탁했으며, 마을의 이장을 대상으로 군수품의 조달을 부과했지만 의병투쟁 기간이 2년여 계속되자 주민 중에서 이탈자가 나오고, 헌병보조원과 밀정의 반민족적 행위로 의병활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의진의 규모를 20~30명 단위로 편성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전등사 주지 송계찬(宋戒燦)을 하도면 장곶(長串) 바다에 수장하기도 하였다. 그가 전등사에 숨겨둔 총 2정을 일본군에게 인계했기 때문이었다.

◆ 이능권의 피체와 순국
일제는 신출귀몰한 작전을 구사하는 이능권을 붙잡기 위해 가족과 일가친척은 물론, 지인들까지 붙잡아 간 것이 <폭도에 관한 편책>. '인경비수(仁警秘收) 제924호'(1908.12.14.)에 기록돼 있다.

"다음 5명의 폭도는 이달 10일 체포하고 지금 취조 중이다.
-. 강화도 위량면 산문동 이효춘(李孝春)
-. 동도 전등사 남문 밖 거주 수괴 이능곤의 생질 남궁(南宮)·문경(文景)·경찬(敬鑽)
-. 동도 전등사 남문 고개 거주 김원식(金元植)
이들을 체포한 것은 수괴 이능곤의 소재를 알 단서라도 될 것임을 신첨한다."

이능권은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이호춘(李浩春)·유성준(兪成俊)·김추옥(金秋玉)·여만복(呂萬卜) 등과 더불어 강화도 11개소에서 약 4만3800냥(876원에 해당. 약 300석치 쌀값)에 달하는 군자금을 마련하여 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한성으로 향했다가 1908년 12월14일 한성(경성)에서 인천경찰서 순사대에 피체되기에 이르렀다.

"수괴 이능곤(李能坤:이능권의 이명-필자 주)은 이달 11일, 경기도 부평 군내에 잠복한 것을 탐지하고, 당서(當署:인천경찰서-필자 주) 순사 감독 미즈노(水野憲)에게 일인 순사 1명, 한인 순사 4명을 딸려 보내 동 군내를 수색하게 하였던 바, 이(李)는 이달 8, 9일경 경성에 들어간 모양이 있으므로 미즈노 순사 감독은 이달 13일 추적하여 경성에 이르러 철야 수색한 결과, 다음날인 14일 오전 11시, 그가 중부 혜교(惠橋:삼청동천과 종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던 다리-필자 주) 2통 8호 윤창하(尹昌夏)의 방에 잠복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체포하여 당서에 인치(引致) 후 취조 중이므로 이에 보고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587쪽)

인천경찰서 순사들은 이능권을 신문하여 그가 '고총(古塚:고인돌)'에 총기를 숨긴 것을 알아내고, 그를 포승줄로 묶어 고려산으로 갔다.

"경기도 인천경찰서원은 12월14일 강화도의 적괴(賊魁) 이능곤을 체포하여 그 자백에 의하여 총 15정, 탄약 566발 및 잡품 다수를 압수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695쪽)

이능권은 6개월여 동안 모진 고문 끝에 1909년 5월29일 경성지방재판소 인천지부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어 공소하였으나 9월27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었으며, 이어 10월13일 대심원에서 상고가 기각되기에 이르렀다. 11월26일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荒助)가 경성공소원 검사장 세코 스케지로(世古祐次郞)에게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했는데, 이는 대한 황제의 재가도 받지 않은 것이었다.

마침내 대동창의진 대장 이능권은 12월2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전신)에서 순국하였고, 그의 무덤은 한강변에 가매장되었다가 비밀리 반장하여 고향 국화리 마을 입구에 평장(平葬)으로 옮겼고, 광복 후 양성이씨 가문에서 선산에 모셨으며,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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