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義兵)이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서 싸우는 구국의 민병(民兵) 또는 정의의 민병이다.

의병에 대한 뜻매김과 그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국권회복기 붓으로 토왜투쟁(討倭鬪爭)을 벌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白岩) 박은식 선생이다. 백암 선생은 저서 <한국통사(韓國痛史)>에 '의병은 민군(民軍)이다. 나라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즉시 의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구해 싸우는 사람이다.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이다'라고 정의했다.

의병이 일어나는 것은 순전히 자발적인 것으로 강제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님을 말했고, 의병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 문화, 국민성 등에 나타난 가장 우수한 특성이라고 밝힌 것이다.
보통 임진왜란, 한말(韓末),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의병의 역사는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일보가 새해부터 매주 연재하는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을 집필하고 있는 한국 의병연구의 대가 이태룡 박사는 저서 <한국 의병사>에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과전서로 일컬어지는 <산해경>에 이르기를 고조선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며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민족의 침임으로 나라가 망하자 배달겨레는 의병을 일으켜서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새로이 세워 찬란한 문화를 이어왔다'고 밝혔다.

고구려는 700여년을 이어오는 동안 한·위·수·당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웅건한 고대문화를 이룩하고 한반도를 지켜내는 방패 역할을 했고, 고려는 13세기 중반부터 수십년간 7차례나 몽골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지만 '삼별초'로 대표되는 대몽항쟁을 벌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정유왜란과 병자·정묘호란 때 의병투쟁으로 나라를 보전했다. 20세기 후반들어 일제가 경복궁 침범과 부왜내각(附倭內閣)을 구성하자 동학농민군의 투쟁이 있었고, 왕비 참살에는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기치를 든 의병이 봉기했고, 을사늑약 체결에는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의병투쟁을 격렬하게 펼쳤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온 의병의 주요 활동지로 인천 강화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삼별초 대몽항쟁의 시발지였던 강화도는 임진왜란, 병인·신미양요 등 과거부터 외세의 침략에 대응했던 결집력이 잠재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가장 치열한 항쟁의 거점이었던 강화도 의병은 이능권을 비롯, 김덕순, 박계석, 연기우, 유명규, 지홍윤 등 대단한 의병장이 많았다.

특히 이능권은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고종의 헤이그특사 이준 열사를 모시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다녀온 호위군관이었다.

이능권은 일제의 감시를 뚫고 이준 특사를 무사히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기차에 오르게 해 임무를 마치고 강화로 돌아왔는데 이준 특사의 '할복 자결' 소식을 듣고 해산된 강화도 전 진위대, 분견대 병사를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해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 대장에 올라 일본군경과 격렬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밀정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1909년 5월 29일 경성지방재판소 인천지부에서 교수형이 선고됐고, 그해 12월 2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전신)에서 순국했다.

구한말 항일 의병운동의 투쟁과 정신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과 광복군의 독립운동에 이어 오늘날 국군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려·조선시대 의병은 중·고교 교과서와 일반 역사서를 통해 접하고 배울 수가 있는데 한말(韓末)의병은 불과 100여년 전의 일인데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제에 의해 자료가 왜곡되고 멸실되거나 남아 있는 자료도 연구가 부족한 상태이다.

그런 면에서 이태룡 박사가 '의병의 본고장 강화에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묻혀있는 많은 의병의 기록을 찾아내고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겨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절실한 실정'이라고 강조한 점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새겨야할 대목이며 후손들에게 잘못된 과거의 사실을 바로잡아 물려줄 역사적 사명으로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할 과제이다.

/여승철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