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40년 … 대제국에 맞설 수 있었던 건 '백성의 힘'
▲삼별초군이 진도로 남하한 출항지로 추정되는 외포리
▲ 강화와 김포 사이 손돌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덕포진의 모습
▲ 강화와 김포 사이 손돌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덕포진의 모습

바다 익숙하지 않은 몽골 침략에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무신들은
정권 유지만 연연하다 결국 항복

전국 치안 맡았던 '삼별초' 사병들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백성들과
개경 환도 반대하며 '대몽항쟁'
왕실서 진압부대 파견하려 하자
좀 더 안전한 진도 → 제주서 활약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는 초기에 동북쪽의 여진지역을 개척하며 국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중기로 접어들면서 무신들이 100년 동안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특히, 최충헌에서 시작된 최씨무인정권은 최우, 최항, 최의로 이어지며 60년간을 집권했다.

최씨무인정권의 전성기인 1231년, 몽골의 대대적인 침략이 시작되었다. 무신정권의 수장인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기로 했다. 1232년 6월16일, 강화도로 천도를 마친 무신정권은 1270년까지 40년간을 몽골에 맞서 싸웠다. 중원과 중앙아시아, 유럽까지 초토화시키며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에게 이토록 오랜 기간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고려국 백성들의 죽음을 무릅쓴 치열한 항쟁덕분이었다.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백성들에게도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그것이 몽골에 대한 대응책의 전부였다. 군사를 동원해 백성과 함께 몽골군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지배층의 특권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절체절명의 국난이 닥쳤음에도 백성들에게서 꼬박꼬박 세금을 받아냈다. 이 세금은 천도한 강화도에 뿌려졌다. 강화도는 몽골항쟁의 지휘부가 아니라 개경과 다름없는 호사스런 생활이 넘쳐나는 곳이 되어버렸다.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처절한 싸움을 선택해야만 했다. 죽음도 마다않는 백성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오직 독과 악만이 넘쳐날 뿐이었다. 백성들의 처절한 투쟁은 '나'와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백성이 곧 '나라'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몽골군을 물리쳐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거나 천민의 딱지를 떼기도 했다. 하지만 백성은 스스로가 나라임을 잊지 않았다.

강화도는 천도(遷都)하기에 최적인 곳이었다. 육지와 좁은 해협은 물살이 거세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바다에 미숙한 몽골군을 막기에 좋은 곳이었다. 또한, 개경과 가깝고 한강, 예성강 등 수로와 전국을 잇는 조운로가 연결되는 곳이어서 물자보급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1234년, 고려는 강화도에 궁궐을 짓고 외성과 내성을 쌓아 장기 항전에 대비했다. 몽골은 6차례에 걸쳐 고려 영토를 짓밟았고 그때마다 백성들은 단결하여 자신의 나라를 지켰다.

2011년, 태안군 앞바다의 마도(馬島)에서 고려시대의 배 한 척이 발굴됐다. 모두 309점의 유물이 인양되었는데 이중에는 삼별초와 관련된 목간도 있었다. 여수에서 강화도 삼별초에게 보내는 물품이었는데 마른홍합, 상어, 견포 등이었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시기에 강화도로 가던 배가 이곳에서 침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0년간의 항쟁기간 동안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유지에 연연했고, 왕실은 생존을 위해 몽골과 강화했다. 1270년, 원종은 몽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개경환도를 시행했다. 고려는 백년간 이어진 무신정권을 끝냈지만, 몽골의 지배라는 또 다른 고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백성의 선택은 더욱 명확하고 치열해졌다. 왕은 없어도 상관없지만, 나라 없는 백성은 죽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은 전국의 치안을 담당하는 삼별초라는 사병을 운영했다. 사실상 고려의 정예병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몽골에 적개심이 강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고려정권이 몽골에 항복하자 개경환도를 반대하며 대몽항쟁에 돌입했다. 그들은 모든 선박과 물자를 강화도로 집결시켰다. 석모도와 교동도는 천혜의 수군기지였다. 섬 앞에 있는 400m의 별립산은 수군기지를 지키는 조망대였다.

별립산 정상에 서니 교동도와 석모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750년 전, 이곳 바다를 메웠을 수많은 배들이 꿈인 듯 아른거린다. 삼별초는 이곳에서 대몽항전을 선포했다. 군사들의 쩌렁쩌렁했을 포효가 바람처럼 황해를 감싼다.

삼별초는 고려궁지에 지휘부를 세우고 해안의 요충지를 봉쇄했다. 하지만 전체 해안을 봉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가까운 거리의 개경 왕실이 대규모 진압부대를 파견하려 하자 좀 더 안전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삼별초는 1000여척의 배를 이끌고 해안을 따라 진도로 향했다. 삼별초의 전선이 출발한 곳은 내가면 구포리 해안선이다. 지휘부는 항파강(缸破江)에 위치한 창후리 포구에서 출발했다. 창후리 포구는 별립산의 남쪽에 있는데, 당시에는 포구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후 농경지가 되어 지금은 저수지로 변했다.

강화를 출발한 삼별초 선단은 영종도와 영흥도를 지나 당진, 서산, 보령, 서천, 영광, 무안을 거쳐 진도에 도착했다. 해안도시를 지날 때마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식량과 물자를 보탰고 스스로 병사가 되어 배에 올랐다. 그들은 모두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백성들이었다. 그러한 백성들이 다시 제주도로 쫓겨 가면서까지 몽골에 대항했다. 무신도 왕실도 지키지 않은 나라. 나라에서 버린 백성이 나라를 위해 장렬히 목숨을 바쳤다. 백성이 지켜야만 하는 '백성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원통한 죽음에도 충직했던 뱃사공의 넋 달래는 '손돌목']

 

<여지도서>의 '강화부'에는 손돌목(孫突項)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여 강화도로 천도할 때의 이야기다. 손돌(孫突)이라는 사공이 고종과 왕족의 배를 몰고 강화도로 향했다. 배가 좁은 협곡으로 접어들자 급류가 선회하고 나아갈수록 앞이 가려 길이 막히는 것 같았다. 왕은 불안하여 손돌을 엄히 꾸짖었다. 손돌은 암초가 많아 그런 것이라고 진언했지만 국난을 당하여 의심이 커진 왕은 손돌을 참수했다.

손돌은 죽기 전에 바가지를 띄우고 이것을 따라가라고 하였다. 결국, 배는 무사히 섬에 도착하였고 왕은 충성스런 손돌을 참수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묘지를 만들어 주고 손돌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매년 음력 10월20일이 되면 강풍과 혹한이 닥치는데 이는 원통하게 죽은 손돌의 넋이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여 '손돌이 추위'라고도 한다.

고려 뱃사공인 손돌의 묘는 덕포진의 북쪽 해안 언덕에 있다. 1970년에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는데, 강화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이다. 손돌의 넋을 위로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