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페스트)은 1346년쯤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해 1355년까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전염병으로, 7500만~1억명이 사망했다. 당시 세계 인구가 4억5000만명 정도에 불과했으니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창 기세를 떨칠 때는 엽기적이게도 어떤 사람이 밤중에 죽자 장례를 치르러 온 친구 2명, 기도차 온 신부, 시체를 나른 사람까지 모두 4명이 다음날 저승으로 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도 당시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프랑스 '오랑'에서는 도시 인구의 절반을 죽음으로 내몰아 막바지에는 관까지 부족해 썼던 관을 다시 사용한다. 하지만 작가가 궁극적으로 담아내고자 한 주제는 역병을 이겨내려는 인간의 의지였다.

2000년대 들어 '전염병'이라는 말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감염증'이 대체재로 떠올랐다. 지금 요동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비롯해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도 감염증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사실 전염병과 감염증은 거의 의미가 같은 용어인데 이유가 궁금하다. 전염병이라 하면 무섭고 전 근대적인 질병이 연상되기 때문인지, 아니면 '전염'을 '감염' 정도로 순화시킬 수 있다는 의학기술의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공포의 연속이다.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나와 가족을 덮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불안과 근심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신종'이어서 정확한 전파 경로나 파괴력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포감을 가중시킨다. 시중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올 여름, 또는 내년 초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말도 나돌고 있다. 인터넷이 공포의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마음의 바이러스다. '모이면 불안하다'며 휴원·휴업·휴관이 잇따르더니 다중이용시설이 아닌 일상까지 숨을 죽이고 있다. 일에 대한 의욕은 바이러스 확진자수와 동선에 대한 촉각으로 옮아갔다. 예방 수칙과 방역 등을 통해 안전에 만전을 기하며 일상생활을 이어가자는 주장은 예민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허튼 소리로 들린다.

공포 바이러스가 역경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위축시킨다면 우리 사회는 이기기 힘든 싸움에 돌입했거나, 이기더라도 너절한 생채기가 남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엄습했을 때 또 다시 좌표를 잃고 헤맬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공포 과잉이다. 세균 바이러스는 의술·방역의 영역에 맡기고, 보다 원초적이고 전염성 강한 마음 바이러스는 우리 스스로 차단해야 한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