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토지'는 그 장강같은 이야기를 '1897년 한가위.'라는 단문으로 시작한다. 그러고 머지않아 이 곳 하동 평사리에도 호열자(콜레라)가 덮친다. 충직한 마름 김서방으로부터 최참판댁의 여장부 윤씨부인까지 차례로 쓰러져간다. 마을의 집집마다 온갖 부적이 나붙지만 그 부적을 써 준 무당이나 중들도 죽어나간다. 그래서 수백년 평사리를 지배했던 최참판댁은 마을에 떠도는 얘기처럼, '고방에 쌀이 썩어나가도 먹을 사람이 없는' 집으로 전락한다. 작가 박경리 선생은 이 대목에 '역병과 흉년-공포의 그림자'라는 음울한 제목을 붙인다.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조선을 한바탕 휩쓴 돌림병이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마을 사람들은 일제 침탈까지 닥치자 마침내 만주벌판으로 아예 떠나간다. 작가는 다시 이 대목에 '고국산천을 버리는 사람들'이라 제목을 달았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비슷한 줄거리의 이야기들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지난 주말 한 영화채널에서 본 '컨테이전'은 "예언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2011년 작품이다. 미국인 여성 베스는 홍콩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증상을 보이며 신종 감염병의 첫 희생자가 된다. 영화에서 감염의 가장 직접적 경로는 손이다. 주인공은 시내로 나가려는 딸에게 "아무 것도 만져서는 안된다"는 어려운 주문을 거듭한다. 딸과 입을 맞추려 하던 딸 남자친구를 얼굴을 붉혀가며 혼을 내기도 한다. 이 와중에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범람한다. 한 유명 블로거는 개나리꽃 액이 특효약이라며 교묘히 현혹해 졸지에 거부가 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숨을 멎게 한다. 중국의 한 돼지 우리 천정에 박쥐들이 가득 서식한다. 그 우리에서 살찐 새끼돼지 한마리가 도살돼 고급 요리집의 주방으로 배달된다. 셰프는 그 새끼돼지를 손질하다 말고 앞치마에 손을 쓱쓱 비비고는 식당 홀로 나간다. 새끼돼지 요리를 주문한 고객이 같이 기념사진을 찍자고 해서다. 셰프와 어깨동무를 했던 그 고객이 바로 첫 희생자 베스였다. 넷플릭스의 최신작 다큐멘터리 '판데믹-인플루엔자와의 전쟁'도 '예언급'으로 꼽힌다고 한다. 여기서도 박쥐가 병원소로 지목되는 점은 같다.

▶손씻기와 마스크 착용이 전부이니, 마스크가 '컨테이전'의 개나리 값인 모양이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마스크 매점매석 토벌령까지 내렸다. 1919년 스페인 감기때부터 쓰기 시작했다는 마스크가 거리를 메우고 있다. 침묵의 마스크 행렬에 무성 영화 속으로 들어온 느낌도 든다. 인적이 끊어진 우한의 거리 장면도 적막 그 자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속은 어떨지라도 겉으로는 짐짓 의연해 하기를 다짐해보자. 오늘 우리 모두, 역병의 시대를 함께 건너는 중이다.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