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역만리 헤이그에 뿌려진 피 이천만 겨레의 울분을 깨우다  
▲이능권 대장의 헤이그특사 호위 수행 일정 및 이동 경로

 

▲ <통감부문서> 3권 '한국인 이준 및 나유석에 관한 건'(1907.04.29.) - 블라디보스토크 무역사무관 노무라(野村基信)가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鶴原定吉)에게 보고한 기밀문서.

 

▲ 이준 열사의 자결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한 대한매일신보 호외(1907년 07월18일자)

 


길목마다 깔린 일제 '철통 감시망' 뚫고
연해주까지 특사 호위할 인재로 선발돼
특사단, 만국평화회의 무사 도착했으나
일제 방해·열강 무시에 이준 열사 '분사'
이능권,  광무황제 강제 퇴위도 겹치자 '분노'

◆ 헤이그특사 호위무관의 막중한 책무
광무황제는 두 차례 이용익을 헤이그특사로 파견하려다가 일제에 의해 모두 실패로 끝나자 특사를 헤이그까지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일본 군경과 밀정들이 육지의 주요 길목과 항구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던 터라 그들의 감시망을 뚫고 특사가 안전하게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수 있게 호위할 유능한 '호위무관(護衛武官)'의 선발이 필수적이었다. 연해주로 가려면 육로와 해로를 거쳐야 했기에 이를 능히 수행할 수 있는 자를 선발해야만 했는데, 여기에 선발된 이가 이능권(李能權:일명 能坤·能漢)이었다.

그는 육군 무관 출신이었는데, 일본 기밀문서 중에는 '해적(海賊)'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수군(해군)으로도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나온 말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는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들어 헤이그특사 부사(副使) 이준(李儁)을 호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던 것이다.

이능권이 이준 일행을 호위하여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열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날이 1907년 4월22일이었다. 이튿날 부산에서 러시아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날이 그달 27일경이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무역사무관 노무라(野村基信)가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鶴原定吉)에게 보고한 기밀문서는 <통감부문서> 3권 '한국인 이준 및 나유석에 관한 건'(1907.04.29)에 실려 있는데, 이준과 나유석이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연해주로 오던 여느 '지사(志士)'들처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항(渡航)'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전 한국 관리들과 기타 민간에게 소위 지사(志士)라고 말하는 무리들로서 조국의 현재 상태에 분개하여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대한정책에 방해를 시도하려고 북한(北韓:한반도 북부지방-필자 주)과 이곳에 산재하고 있으면서 상호 기맥을 통하는 중에 있는 자가 다수이기 때문에 평소 저들의 출입행동에 대해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바, 이번에 전 평의원(評議院:평리원의 오기-필자 주) 검사 이준(李儁) 및 의관(議官:중추원의관-필자 주) 나유석(羅有錫:羅裕錫 오기-필자 주) 두 사람이 경성에서 이곳으로 도항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들은 지금 이곳에 체재하고 있으며 2~3일 전에는 이곳 한국인들이 경영하고 있는 소학교를 참관하면서 아동들을 모아 한차례 연설을 통하여 조국의 쇠망하는 현재 상태를 말하면서 후일 반드시 이웃나라의 기반에서 이탈하여 독립을 완수하도록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격려한 일이 있습니다."

이준 특사는 북간도 연길현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고 반일교육을 하던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李相卨)에게 그의 아우 이상익(李相益)의 이름으로 전보를 보냈다. 전보를 받은 이상설은 훈춘에 학교를 세우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이준을 만나 헤이그특사 정사(正使)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헤이그특사 일행은 5월24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 러시아공사 이범진·이위종(李瑋鍾) 부자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광무황제는 이에 앞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에게 특사 위임장을 주고 종전의 수교 9개국 국가원수들에게 보내는 친서도 함께 보냈다. 헐버트는 5월8일 서울을 출발, 일본을 경유하여 5월 중순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일제는 헐버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그가 헤이그에 도착하더라도 특사로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대책을 강구해 두고 있었지만, 정작 헤이그특사 이상설·이준 일행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오르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이었다.

'이날 이상설·이준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러시아 수도로 향하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무역 사무관이 이를 통감부에 보고하여 그들이 헤이그(海牙)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할 것이라고 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7년 5월24일조 참조

광무황제의 헤이그특사 파견 작전은 이렇게 성공하게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수행원으로 이미 폐쇄된 주러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러시아공사 이범진의 둘째아들)과 합류한 후 전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Weber)의 주선을 얻어 러시아 황제에게 광무황제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광무 11년(1907) 4월20일자로 된 친서는 '만국평화회의 파견원(특사)'을 보내니, 특사가 그 회의에 참석해서 대한의 형세를 설명할 수 있도록 러시아 황제가 특별히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특사 일행은 헤이그에 파견돼 있던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v) 백작에게 보내는 러시아 황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헤이그에 도착한 날은 6월25일경이었다.

◆ 대한매일신보 호외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씨가 네덜란드 헤이그(海牙)에서 할복 자결했다'는 요지의 기사가 배달겨레의 가슴을 격동시켰다. 광무황제 퇴위 전날인 1907년 7월18일, '의사가 자결'이란 소제목의 대한매일신보 호외였다.

'의사가 자결 - 전 평리원 검사 리준 씨가 현금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파견원으로 갔던 일은 세상 사람이 다 알거니와 작일에 발한 동경전보를 거한 즉, 해씨(該氏)가 흥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자결하여 만국사신 앞에서 피를 뿌리쳐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18일 호외

이튿날 경향신문은 '의사자결'이란 제목으로 대한매일신보 호외를 그대로 실었는데, 당시 2000만 배달겨레의 가슴에 민족적 울분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훗날 <매천야록>에도 실렸다.

'이준은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의 배를 찌르고 뜨거운 피를 움켜쥐고 좌석에다 뿌리며 말하기를, '이같이 해도 족히 믿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피가 철철 흐르고 몸은 이미 쓰러지니 회의 참석자들은 크게 놀라서 서로 보며 말하기를, '천하의 열렬한 대장부다' 하고, 모두 일본이 나쁘다고 했다.' <매천야록> 제5권, '해아밀사 이준의 자결'

이준 열사가 일제의 조직적인 방해와 열강의 무시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의 배를 찌르고 뜨거운 피를 움켜쥐고 좌석에다 뿌리며' 자결, 순국한 날은 7월14일이었다.

◆ 이준 특사의 자결과 광무황제 퇴위 소식, 강화도까지
한편, 강화도에 귀향하여 이준 특사 일행이 무사히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큰 성과를 냈다는 소식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이능권에게 '이준 특사의 자결 순국'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이어 광무황제가 일제와 그들 앞잡이 내각에 의해 퇴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이능권은 나귀를 타고 강화 동문으로 들어가서 강화분견대 병영 분위기를 살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진위대 제1연대 1대대(통칭 강화진위대) 600여명이 주둔하던 곳인데, 겨우 2개 소대 50여명으로 축소된 강화분견대는 그날따라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였다.

나귀 고삐를 당겨 향한 곳은 부내면 보창학교(普昌學校)였다. 설립자이자 교장인 이동휘(李東輝)는 사흘 전 한성(경성)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2년여 전까지 강화진위대장을 역임한 참령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립육영학교 학생 20여명을 인솔하여 덕수궁으로 가서 광무황제를 알현했을 때 '보창(普昌)'이라는 교명과 함께 교비에 사용하라고 600원을 하사한 적이 있었기에 그는 광무황제의 퇴위가 남달랐으리라!

그가 집으로 돌아오니, 사랑에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 진위대 출신 군인들과 인근의 지인들이었는데, 모두 비분강개한 나머지 분통을 터뜨렸고, 심지어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