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깊다. 국가를 넘어 인천에선 중국과의 관계가 밀접했다. 인천 개항(1883년) 후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속속 몰려들면서부터다. 대개 중국 산둥성 출신의 그들은 한군데 모여 생활하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것이 오늘날 차이나타운의 효시다.

예전엔 지금 차이나타운으로 일컫는 중구 북성동 일대를 '청관(淸館)거리'로 불렀다. '청관'의 경우 공식지명은 아니지만, 구한말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청국 조계(租界)를 통칭하던 말이다. 조계는 19세기 후반 한국과 중국 등지에 형성했던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 외국인이 살면서 각종 상업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던 곳이다. 조계 길을 따라 동순태(同順泰)를 비롯해 인합동(仁合東)과 동화창(東和昌) 등 청국 거상들이 운영하는 큰 점포가 많았다고 한다. 청인 수가 늘면서 자연스럽게 '청요리집'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짜장면도 이런 연유로 탄생했다. 1905년 개업한 공화춘(共和春)에서 국내 처음으로 짜장면을 팔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번창하던 청관의 상권은 1937년 중일전쟁 여파로 거의 마비되고 말았다. 전쟁 직후 일제에 의해 활동에 제약을 받던 젊은 화교들은 대만이나 동남아시아, 미국 등지로 이주했다. 특히 한국전쟁 후 정부가 외환거래규제법·거주자격심사강화 등과 함께 1967년 외국인 토지소유권 제한조치를 펴자, 중국인들은 더 많이 한국을 떠났다. 그러다가 20여년 전 외국인에 대한 규제를 풀면서 이들이 한국에 정착하거나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천 차이나타운도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 이름과 더불어 새롭게 탈바꿈을 시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엔 완전히 차이나타운으로서의 명망을 찾아 관광객이 북적거리는 곳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런데 요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인 '우한 폐렴'이 확산되자, 인천 차이나타운에 관광객 발길이 뚝 끊어졌다. 거리는 썰렁하기까지 하다. 동남아권 외국인 단체 관광객 감소는 물론 식당을 주로 찾는 한국인 손님들도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잘 나가던 때의 절반도 매상을 올리지 못한다며 상인들은 울상을 짓는다. 그 많던 인파는 간 데 없고 '오해와 편견'만 넘실거린다고나 할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감이 의외로 크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이 중국을 꺼리는 분위기로 이어지고, 집단적인 기피현상으로 지속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근거도 없는 '가짜정보'를 더해 상대를 배척하면, 사회적인 불안감만 더욱 드세진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중국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로 봐야 한다. 서로 협력하며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