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바다 생명의 바다, 황해] 15. 자주국 조선을 침탈하려는 제국들의 전쟁 '러일전쟁' … 그곳에 조선은 없었다
[문명의 바다 생명의 바다, 황해] 15. 자주국 조선을 침탈하려는 제국들의 전쟁 '러일전쟁' … 그곳에 조선은 없었다
  • 남창섭
  • 승인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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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아픈 역사는 조선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 러일전쟁 당시 조선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
▲ 러일전쟁 당시 조선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

 

청일전쟁 이긴 일본이 요동반도 넘보자
긴장한 러시아는 청과 비밀동맹 맺고
영국은 러시아 남하 막고자 영일 동맹
미국도 자국 이익 얻으려 일본 돕기로

지원군 얻은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 집결
제물포서 러시아 무너뜨리고 황해 장악
한반도 지배권까지 얻자 '통감부' 정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고 한반도는 물론 요동반도의 영유권을 차지하려고 했다. 이에 긴장한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이끌어내면서 일본의 야욕을 좌절시켰다. 나아가 청과 비밀동맹을 맺어 오히려 뤼순, 대련 등을 조차하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동청(東淸)철도를 건설하여 만주지역으로 세력을 뻗쳤다. 만주를 차지하려던 일본은 러시아의 움직임을 묵과할 수 없었다. 무력충돌을 일으켜서라도 동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다.

1900년 6월,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터져 만주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러시아는 요동반도의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진주시켜 무력을 과시하고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일동맹을 맺고 일본을 적극 지원하였고, 이에 일본도 한반도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 거점이 인천이었다. 일본 군함이 인천항에 주둔한 것은 발해만과의 연락을 취하기에 좋을 뿐 아니라, 수도권의 관문을 병참기지화함으로써 세상의 이목을 끌지 않고 단번에 서울 이남을 일본의 세력권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04년 2월9일. 일본함대는 전날 뤼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에게 포격한 것을 시작으로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전함 바리야크호를 기습 공격했다. 러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에 비해 4배 이상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은 아자마 호를 선두로 바리야크 호는 집중 공격했다. 전력에서 열세를 느낀 러시아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바리야크 호를 비롯해 세 척의 전함과 상선을 침몰시켜야만 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러시아 병사들은 추운 겨울바다에 뛰어들었다. 가까이 있는 미국 전함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여 자국의 이익을 얻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은 청일전쟁에 이어 또다시 조선의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수도 한양의 관문인 제물포에서 시작된 포성은 한반도 전체를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조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참화는 그대로 조선이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제물포해전에서의 승리로 황해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로부터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와 함께 안정적인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송하여 러시아를 밀어내고 만주지역까지 차지하려는 원래의 목적에 한층 더 다가서게 되었다.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승리한 기세를 몰아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하였다. 1905년 1월1일에 뤼순(旅順)을 함락하고, 3월에는 오늘날의 센양(瀋陽)인 봉천(奉天)을 장악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러시아를 물리침으로써 공동의 목적을 달성했다.

뤼순박물관은 러일전쟁의 상흔을 잊지 않으려는 듯 전쟁 당시의 사진과 자료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아편전쟁과 청일전쟁만큼은 아니지만 일본군에 대한 많은 적개심을 일깨우는데 부족함이 없다. 청은 러시아에 주었던 여러 권한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주었다. 일본은 뤼순에 관동군사령부의 전신인 관동도독부를 설치했다. 이는 일본이 만주지역을 점령하는데 지휘부가 되었다.

대한제국을 장악한 일본은 통감부 정치를 시행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했다. 고종은 자주국의 왕으로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세 명의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악행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의 무효를 호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밀사들은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회의에 참가할 수 없었다. 약소국의 설움에 이준은 죽음으로 호소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열강은 냉랭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일제통감부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켰다.

러일전쟁 발발 100주년인 2004년, 인천시는 러시아정부의 요청에 부응하여 인천해전전몰장병추모비를 연안여객터미널 옆 친수공간에 건립했다. 아울러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바리야크호>의 선수기(船首旗)를 장기임대 방식으로 러시아에 대여했다. 그 이유는 양국의 친선교류와 통상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인천은 제국주의의 망령을 추모하고 그들에게 짓밟혔던 아픈 역사를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려야만 하는 땅인가.

 




[당시 일제가 바꾼 '송도' 지명 버젓이 … ]

러일전쟁은 인천 팔미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중립국을 선언한 주권국이었다. 하지만 중립국을 선언한 지 한 달도 못되어 인천 앞바다에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해전에서 한반도와 한국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싼 제국주의들 간의 쟁탈전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월미도의 민간인과 가옥을 장악하고 군사기지로 삼았다. 또한 침몰시킨 러시아 함선을 인양하여 인천지역 곳곳에서 전시하며 승리감을 만끽하고 제국 신민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했다. 본토의 일본인들도 일제의 영광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관광단을 모집하여 인천으로 왔다. 1905년부터 2월9일은 '인천데이'가 되었다. 일제시기 내내 매년 2월8일과 9일은 인천해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를 개최했다. 아울러 8절까지 있는 군가를 제작하여 승리를 되새겼다.

1940년에는 인천의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이때 러일전쟁서 승리한 군함과 지휘관 이름을 차용해 인천의 지명을 고쳤다. 가정리(佳停理)는 군함 치요다(千代田)의 이름을 차용하여 천대전정(千代田町)이라 하였고, 간석리(間石理)는 인천에 상륙한 키고시(木越) 여단의 이름을 차용하여 목월정(木越町)이라고 하였다. 검암리(黔岩理)는 일본함대 해군소장 우리우(瓜生)의 이름을 따서 과생정(瓜生町)이라고 하였다. 일본식 지명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1일 이후 다시 바뀌었다. 하지만 그때 이후 오늘까지 바뀌지 않고 있는 지명이 있으니 바로 인천을 대표하는 국제도시인 '송도(松島)'이다. 이 지명은 일제가 전함 마쓰시마(松島)호의 이름을 따서 옥련리(玉蓮理)를 송도정(松島町)이라고 개편했던 것이다. 그 후, 옥련동으로 복원하면서 송도는 버리지 않았다. 아니 '소나무 섬'들이 인천은 물론 전국적으로 생겨났다. 1904년, 처참하게 짓밟혔던 전쟁터에 인천은 없었다. 그런데 백년 하고도 십년이 더 지난 오늘날에도 식민의 잔재가 버젓하게 남아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신민교육 때문인가, 인천의 속없는 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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