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1일, 당시 포항시와 영일군 일대는 잔치 분위기로 술렁댔다. 마침내 포항제철 착공식이 열린 날이다. 벽촌의 촌로들까지 모래바람만 몰아치는 바닷가 백사장의 착공식장으로 몰려들었다. 어느 마을에서는 행사장에서 돌아오던 버스가 논바닥에 처박히는 교통사고도 있었다. 하나같이 흙투성이가 된 동네 사람들이 착공 기념 타월만 챙겨들고 걸어서 돌아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국의 첫 국민기업이자 글로벌기업인 포스코는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로 출발했다. 그래서 처음 한 20여년간은 '포철' 또는 '종철'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회사는 세워 놓았지만 제철소는 커녕 변변한 철공소 짓기에도 가난한 나라였다. 국제차관 교섭은 번번이 깨졌다. 이자는 커녕 원금도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 봐서다. 마침내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으로 제철소를 짓기로 한다. 이날 착공식에서 초대 사장 박태준은 다짐한다. "무상 3080만 달러, 유상 4290만 달러는 '조상의 피의 대가'입니다. 그 돈에서 앞으로 포항제철이 지켜나가야 하는 고도의 윤리성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조상들 피의 대가로 태어난 포항제철의 성공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아는 바와 같다. 제철소 입지 선정부터 엄격했다. 당시 JP는 충남 비인, 이후락은 울산으로 끌어가려 했다. 최종 회의에서 박태준은 새파란 상공부 실무자를 앞세워 정치 입김을 잠재웠다. 1973년 용광로에 첫 불을 댕기고 6개월만에 순이익 1200만 달러를 실현했다. 10년만에 철수했던 일본기술단이 석별의 글을 남겼다. '이 회사는 머지않아 세계 최고가 될 것이다.' 제철소 정문에는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 늘 내걸려 있었다. 1988년에 초대형 국민주 공모로 국민들에 보답했다.

▶지금은 인천 기업인 포스코건설도 이런 포항제철과 함께 성장했다. 초기 포항제철의 엔지니어링·건설본부가 그 모태이다. 고로는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들어 내는 제철소의 핵심이다. 처음 1기를 빼고는 포항·광양제철소의 고로 모두를 포스코건설이 세웠다. 포항제철소 제1고로 건설 3년동안 일본의 100년 기술을 모두 습득한 것이다. 이제는 전세계를 무대로 제철·에너지·물환경 플랜트로부터 철도·신도시 개발에까지 나서 있다. 2010년 송도국제도시로 옮겨 오면서 5000여 고급인력들도 인천시민이 됐다.

▶그런 포스코건설이 브랜드 '더샵(THE SHARP)'을 새로 단장했다고 한다. 더샵(#)은 음악의 반올림표처럼 '고객 삶의 가치를 반올림한다'는 의미다. 3년 연속 고객 충성도 1위 기록도 갖고 있다. 세계 속에 '산업 한류'를 전파해 가는 포스코건설은 이제 인천의 향토기업이라 할만하다.

/정기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