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8.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 (1)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흙 국(土羹)과 종이 떡(紙餠)인 학문은 안 한다
[아! 조선, 실학을 독하다] 8.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 (1)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흙 국(土羹)과 종이 떡(紙餠)인 학문은 안 한다
  • 여승철
  • 승인 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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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제자, 조선 최고 실용백과사전 엮어내
▲ 서유구 초상.

저술기간 36년, 참고서적 900여권, 총 113책 50여권, 글자 수 250여만여자, 표제어 1만여개의 방대한 정보, 설명을 위한 삽화까지 담아 낸 조선 최고의 실용 백과사전, 이것이 바로 서유구 선생이 지은 <임원경제지>이다.

선생은 "밥버러지가 되지 마라. 관직이 없는 이들은 자기 식솔의 의식주는 자신이 책임져라. 주경야독의 건강한 선비정신을 지켜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 실학자였다. 그렇기에 선생은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고루하고 헛된 학문을 '흙으로 끓인 국(土羹)이요, 종이에 그린 떡(紙餠)'이라고까지 경멸한다. (나 또한 이 글이 '토갱'과 '지병'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며 쓴다.)


그러나 이 조선판 브리태니커 사전을 편찬한 서유구 선생은 자신의 평생을 '오비거사(五費居士)'라 정리했다. '다섯 가지를 낭비한 삶'이란 뜻이다. 선생이 다섯 가지를 낭비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독자들께서 셈 칠 일이고 우선 그 약력부터 살펴본다.

풍석 서유구 선생의 자는 준평(準平), 호 풍석(楓石),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울 생(生)이며 본관은 대구(大邱·달성)이고 당파는 소론이었다. 선생은 영조와 정조, 순조, 헌종에 이르기까지 4명의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를 살면서 82세까지 장수했다.

북학파와 교류하며 특히 연암 박지원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형 서유본과 선생은 모두 연암 박지원의 제자이다. 선생은 젊은 시절 글을 발표할 때 꼭 연암에게 보여 주고 허락을 받았다. 박지원의 글을 비판한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金祖淳·1765~1832)과 싸움은 널리 회자될 정도였다.

선생은 판서 서종옥(徐宗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으로 문명을 들날린 서명응(徐命膺·1716~1787)이고 작은 할아버지는 삼정승을 지낸 서명선(徐命善·1728~1791)이다. 생부는 이조판서 서호수(徐浩修·1736~1799)이며 어머니는 김덕균(金德均)의 딸이다. 중부는 서형수(徐瀅修·1749~1824)이고 당숙(堂叔) 서철수(徐澈修)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의 할아버지 서명응은 <고사신서(攷事新書)>를, 아버지 서호수는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지었다. 형은 서유본(徐有本·1762~1822)으로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을 남겼으며 부인이 <규합총서(閨閤叢書)>의 저자이자 여류 시인으로 유명한 빙허각(憑虛閣) 이씨이다.

선생의 가문은 그야말로 벌열(閥閱) 중에 내로라하는 가문이었다. 이 달성 서씨 가문은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을 종합하고 농서를 집대성한 19세기 최고의 실학자 집안이다. 가학이 이렇듯 농학(農學)인 집안은 조선 500년 역사상 찾기가 어렵다.

선생은 27세인 17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어 규장각에 들어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34세에 순창 군수가 되었는데 이때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綸音)에 접하고, 도 단위로 농학자를 한 사람씩 두어 각기 그 지방의 농업 기술을 조사, 연구하여 보고하게 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내각에서 전국적인 농서로 정리, 편찬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제안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정조의 윤음으로 가학이기도 한 농학을 체계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노론의 세상이 되고 1806년 43세에 중부 서형수가 김달순(金達淳)의 옥사에 연루된다. 삭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체직(遞職·벼슬자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갈리는 것)되며 벼슬로부터 멀어진다. 이후 선생은 금화, 대호, 번계, 두릉으로 거처를 옮기며 농사를 짓는다. 이 기간에 아들 서우보의 도움을 받으며 <금화지비집(金華知非集)>,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번계모여집(樊溪餘集)>, <임원경제지> 등을 저술한다. 이 시절 선생은 세 들어 살며 죽조차도 마음 놓고 먹지 못한 가난이 이어졌다. 선생은 손에 못이 박히도록 농사 지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1827년 선생이 64세 되던 해 2월, 효명세자가 18세 나이에 부왕 순조의 건강 악화를 이유로 대리청정하게 되며 선생의 벼슬길이 트인다. 3월, 강화부 유수가 되고 6월에 아들 서우보가 33세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일을 겪는다. 아들 서우보는 선생을 도와 <임원경제지>를 만들었다. 이후 선생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계속 농사관련 저술에 힘을 쏟아 <종저보(種藷譜)>를 지었다. 76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79세에 '오비거사생광자표'를 짓고 1845년 82세 11월1일, 시중드는 자에게 거문고를 타게 하고는 연주가 끝나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유원은 이 일을 적고 '신선이 된다는 일'과 같다고 하였다.

 

▲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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