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 사는 박금자(77)씨는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고통의 연속이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박씨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1984년 9월12일 당시 3살이었던 금쪽같은 막내 희택이가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틀 전 추석 명절에 큰댁과 작은댁 친지 모두가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냈던 공간에서다. 그렇게 박씨의 일상은 1984년 9월12일에 멈춰져 있다.
박씨는 이날 오전 9시쯤 모처럼 가족들과 가평으로 나들이 간다는 기쁜 마음으로 채비를 했다. 많은 친지가 모여 차량 공간이 비좁았던 터라 모두가 함께 이동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희택이와 단둘이 집에 남았다. 나들이는 못가더라도 아들과 함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박씨는 이날이 '비극'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배고프다던 희택이에게 음식을 손수 만들어 줬다네. 맛있게 먹는 모습이 참으로 예뻤어. 깜빡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안보였다네. 온 동네를 찾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어.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한 거야."
박씨 가족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희택이를 찾아 헤맸다.
당시 아동 전문기관이 없었기에 가족 3~4명이 모여 안 가본 고아원이 없을 정도로 전국을 누볐다. 희택이가 실종된 지 3~4개월쯤 후 전주 한 고아원에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떨렸다. 희택이를 꽉 안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고였다. 곧장 달려갔지만 희택이 또래의 다른 아이였다.
돈 내놓으라는 협박 전화를 받기도 했고, 인근 지역에서 목격했다는 전화도 끊이지 않았지만 '희망 고문'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비극은 또 찾아왔다. "꼭 희택이를 함께 찾자"고 했던 남편이 1988년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등졌다.
몸과 마음이 지친 박씨에게 우울증이 찾아왔고, 몸도 많이 상했다. 남편마저 잃었을 때에는 박씨는 의지할 곳 없어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들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죄책감에 마음을 다잡았다. 공장 일을 일부러 밤늦게까지 하면서 희택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도 희택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네. 밥을 굶지 않을까, 아픈 곳은 없을까.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하도 울고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그 고통은 없어지지 않고 매일 같이 밀려 온다네."
희택이를 찾아 헤맨 36년 세월. 화목했던 박씨 가정의 상흔도 그 깊은 세월만큼 산산이 부서졌다. 박씨는 세 살 아들을 기억하는 동안 자신의 머리를 연신 쥐어뜯으며 원통해했다. 박씨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은 후 희택이를 위해 기도하러 간다면서 자리를 떴다. "올해는 만날 수 있을까?"
/이경훈 기자 littli18@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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