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연  

 

집 근처에
공터가 하나 사라지는 중이다.

건물이 들어서면서 공터엔 꽝꽝 박히고 구부러지고 부서지는 소리 들리더니 조용했던 빈자리, 꽉 채우며 사라지는 중이다.

그 공터엔 구부러진 것들이 널려 있다. 반듯한 새 집이 지어지는 동안 빠져나오는, 부서지고 우그러지고 포개어지는 것들은 무엇일까. 공터의 눌러앉았던 의자, 포플러 가지 위에 오래된 새들의 둥지. 비어있는 공터를 꽉 채우던 햇살은 아닐까.

새 집이 지어지는 공간은 쓸쓸한 자취들이 살던 곳. 아름다운 창고를 만들려고 버려진 것들이 모여들었던 곳. 공터의 서쪽 모서리를 깎아내고 깎아낸 모서리를 동쪽에 맞춘다. 짧은 것들로 높은 것을 만들고 넓은 것들을 좁혀 방을 만들고 햇살을 불러들여 그늘을 만든다.

빗줄기는 반갑지 않은 재료다.

새들이 잠자는 곳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을 때 부유하게 떠다니던 공터가 새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자리가 몇 층의 눈길이 된다.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자리에 몇 층의 건물이 생기면서 되돌아보게 되는 삶의 진실성. 김화연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우리들의 그런 삶의 모습들이다. 시인은 '공터'에서 비움과 버림의 가치를 발견한다. 버려진 것들의 가치는 평범한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반듯한 새 집이 지어지는 동안" 오래된 새들의 둥지가 파괴되고, 공터를 살아 숨 쉬게 했던 햇살이 사라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휴식을 안겨 주던 의자가 없어지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누구에게나 소유할 수 있던 것들이 특정한 누구에게만 주어지는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일반 사람들은 모두 '유'를 소중히 여기고 '무'를 경시하며, '유'를 취하고 '무'를 버리며, '유'를 쓸모 있는 것으로 여기고 '무'를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편견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공터에 생긴 새 건물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다. 시인이 인식하는 공터는 비어 있는(空) 터가 아니라 모두를 채워주는 공(共) 터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노자는 "찰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는 데에는 빈 공간(無)이 있어야지만 그릇의 쓰임이 있게 된다.

'쓸모없는 것의 쓰임'(無用之用)이랄까. 비워야만 더욱 채워지는 것은 단지 그릇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도 빈 공백이 있을 때 더욱 깊어지는 법이다. 이것이 김화연 시인이 전하는 근본적 성찰일 것이다.

/강동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