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의 야욕으로 짓밟힌, 힘없던 조선의 땅과 바다

 

▲ 청과 일본의 강화협상 모습

 

청의 종속국 한반도 넘보던 일본
'조선의 독립' 외치며 열강에 아첨

영국은 러시아 견제·미국은 중립
청·일에 "한반도 공동점령" 제안

든든한 후원국 얻은 일본은
청나라 공격해 연달아 승리하자
조선을 대륙침략할 병참기지로



1894년 7월25일.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맞붙었다. 동아시아에서 맹주의 자리를 지켜온 청과 근대문물을 가장 빠르게 받아들여 철저한 전쟁 준비를 한 주변부 국가 일본. 이 두 국가가 조선을 놓고 조선의 바다에서 전쟁을 벌였다. 바로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은 전통적인 조공질서 체제를 유지하려는 청과, 조선을 청의 영향권에서 이탈시켜 군사적 요충지로 만듦으로써 한반도를 넘어 만주까지 넘보려는 일본의 야욕이 충돌한 것이었다. 전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아시아 맹주를 자처하던 청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승부는 풍도해전에서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북양함대까지 만들어 어깨를 으쓱이던 청은 아편에 이어 부패로 무너졌다.

조선은 한 때 실학이 왕성하기도 했지만 개방과 동시에 근대적 개혁은 난관에 봉착했다. 전통질서와 신질서는 조화롭게 발전하지 못하고 무질서한 행정조직만 양산한 채 충돌했다. 이러한 충돌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이어졌다.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의 입지 강화를 위해 조선의 내정에 관여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앞세워 청과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일본은 믿었던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자 간섭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당겼다.

동학혁명은 청과 일본이 조선을 휘젓는 기폭제가 되었다. 조선정부는 동학군을 제압하기 위하여 청군을 불렀다. 청군이 아산만을 통해 상륙하자 일본도 재빠르게 인천에 군사를 상륙시켰다.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청국상인들은 다투어 귀국길에 올랐고, 조선인들은 지방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조선인의 땅에서 청과 일본이 설쳤고 조선인은 죽음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청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일본, 속국인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구한다는 청국. 두 나라가 벌이는 전쟁은 조선이 원하는 전쟁이 아니었다. 애당초 '독립국 조선'을 차지하려는 야욕만 넘치는 전쟁이었다. 일본의 '조선의 독립'이란 구호는 전쟁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서구 열강이 생각하는 '조선의 독립'은 역사가 늘 그래왔듯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어야만 했다. 영국이 판단하는 조선의 독립이란 곧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원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일본은 발톱을 숨기고 열강들에게 말했다. "절대 침략이 목적이 아니며 조선의 평화가 회복 되는 즉시 철병할 것"이라고 사탕발림을 했다. 나아가 "일본군의 철수가 곧 동양의 평화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고 역설했다. 미국은 불개입을 천명하고 '조선의 독립과 평화 확립'을 지지했다. 결국 일본의 입장을 옹호한 것이다.

또한, 영국은 러시아와 협의하여 청일 양국이 조선을 남북으로 점령하는 '한반도 공동점령과 보호령'을 제안했다. 러시아의 견제를 위한 것이었으며, 프랑스와 독일도 인지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국과 러시아의 제의는 러시아의 참전을 막는 것임을 일본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중립'을 표방한 것도 일관된 친일 정책이었다. 드디어 일본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개전 명분과 서구 열강의 든든한 후원국을 등지고 확실하게 야욕을 채워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주국 조선'은 조선의 의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서구열강의 상호 견제와 자국의 정치적 이익의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다. 당파와 쇄국으로 점철된 나약한 조선의 당연한 결과였다.

일본은 이러한 틈을 노려 청나라를 공격했다. 풍도해전, 아산전투, 평양전투에서 연달아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대륙침략을 단행했다. 뤼순(旅順)에서 2만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웨이하이(威海)에서 청의 북양함대 본진을 격파했다. 청은 결국 항복했고,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과 대만 등을 차지하며 본격적인 대륙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가 되어 36년간 약소국의 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 여객터미널에서 류궁다오(劉公島)로 향하는 배에 오르면, 배가 출발하자 금방 류궁다오가 보인다. 류궁다오는 북양함대의 기지였던 곳이다. 하지만 청일전쟁 당시 류궁다오는 일본군에 의해 쑥밭이 됐다. 그날의 아픈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듯 류궁다오 입구에는 갑오전쟁박물관이 있다. 중국인들은 청일전쟁을 갑오전쟁으로 부른다. 박물관은 각종 사진과 자료로 청국의 패배과정을 처절하리만치 묘사해 놓았다.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의도 보인다.

우리는 어떤가. 일제 36년간의 처절한 역사를 올곧게 담아 놓은 박물관이 있는가. 설움의 역사를 인내하며 옹골찬 마음을 일깨우는 근원. 그 절절한 기억의 창이 있는가. 아니 망각의 늪에서 설움의 시간조차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가.
 




[군인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전쟁·전염병으로 목숨 잃어]

청일전쟁 당시 양군은 조선의 인천과 아산으로 군사를 상륙시켰다. 조선의 민중은 동요하여 피란했고, 청일 양국은 조선 땅에서 각종 군수물자를 징발했다. 이로 인해 물가는 폭등하고 민중의 생활고는 더욱 처참했다. 일본군은 조선 인부들을 고의적으로 사살하여 공포감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양국의 병사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부녀자를 겁탈하고 가축을 약탈했다. 조선의 모든 곳에서 참담한 약탈이 자행되었다.

일본은 철도와 도로를 닦아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였고, 이때마다 어김없이 조선인의 강제 징발이 단행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 조선은 폐허가 되었다. 경기, 황해, 평안도의 호구(戶口)가 1/3로 줄어들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는 모든 것이 약탈되어 짐승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피란 간 백성들은 돌아오지 못하였고 대도시의 빈집은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전쟁이 끝나자 전염병이 창궐했다. 의주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전국으로 번져 30여만명이 사망했다. 이질, 장티푸스, 말라리아, 천연두도 득세했다. 특히, 이질이 극심했는데 인천과 평양, 안주 등지에서는 환자가 넘쳐났다. 어느 외국인 종군기자는 '부패한 시체들에서 나는 악취로 1분이라도 향수병을 코에서 뗄 수 없으며 밥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군인들보다 더 많은 백성들이 전쟁과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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