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에는 나이 생각을 피해 갈 수 없다. 출판기념회 뒷자리에 앉아 나이 상념에 젖는 일이 잦았던 한 해를 보내던 차에 대미는 '18세 선거권' 소식이었다. 주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났었기에 10대 후반 학생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소소한 일상을 떠올려 보는 감회가 남달랐다.

대개 인간이 미성숙과 성숙을 오가면서 삶을 생성해 가듯, 학생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들었다고 말해도 좋을 연치들 속에 여전히 아이가 자라고 있듯, 아이들 속에도 의젓한 어른이 들어 있다. 투표권을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해 부여하던 시대를 어이없어 한다면 투표권 쥐어 주는 일 하나로 18세와 19세를 구분해 소동을 벌였던 지난 시기도 금방 그리 되지 않을까 싶다.

춘향전을 가르치다 보면 도리 없이 이몽룡과 춘향이가 나이를 트는 장면을 설명하게 된다. 수치를 표현하는 방법은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이팔'이라고 읽으면 학생들은 당연히 28세로 알아듣는다. 아침에 첫눈에 반한 여성을 그 저녁에 쫓아가 기어이 몸을 섞는 관계의 속도를 말하고 난 다음이니 오죽하랴. 김경아 명창이 편저한 '김세종제 판소리 춘향가' 창본을 들춰보면서 혼자 실소한 대목은 '도련님 한 분이 계시되 연광(나이)은 십육세요'라는 아니리였다. 춘향이 나이를 찾아보니 방자가 '열대여섯살 먹은 처녀'라고 말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소설 판본에서는 둘 다 '이팔=열여섯'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어쨌건 부부연을 맺어 몸으로 어른(?)이 되고 사랑을 완성해 가며 각자 몫의 삶을 살아낸 때가 10대 중반이다.

뒤늦게 받아 든 이희환 박사의 책 '청년 김구가 만난 인천, 사람들'에서도 나이부터 셈해 보게 된다. 김구 이전의 김창수가 인천과 연을 맺기 전에 살아 낸 18살 즈음의 인생살이는 혹독하다. 1894년, 동학혁명에 접주로 출정한 젊은 시절 김구의 심경을 헤아려 보지 않을 수 없다. 백범일지에는 '총가진 군인 700여명'을 이끌고 '해주성을 함락시키고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선봉에 선 다 큰 장정이 홍역을 앓는 장면이 있다. 삶이 이끄는 가치를 따라 목숨을 바치려는 대장부 몸속에 이미 앓아 넘겼어야 할 어린 역병이 남아 있다. 몸은 어리되 기개는 높은 김구는 그렇게 장성해 인천과 연을 맺는다.

구준회 기자의 '헬로 징기스칸' 출판기념회에서도 나이를 뒤적였다. 책에는 그의 생애를 기록한 몽골비사에 19세부터 27세까지 8년간 기록이 없다는 대목이 있다. 빼앗긴 아내를 되찾기 위해 매진하면서 몽골 초원 풍습에 따라 큰 부족장에게 의탁했던 기간이었을 것이다. 몸을 은신하면서 대제국을 일으키려는 포부를 다듬던 징기스칸에게 약관이라는 나이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붉은 색 표지가 강렬한 이원규 선생님의 김원봉평전을 읽어가면서 더 무람해졌다. 우리나이 19세, 만으로 따져 18세인 김원봉은 빼앗긴 조국 산하를 일주한다. 평생지기를 만나고 뜻을 벼려 22세에 의열단 대장이 되어 살아갈 삶을 다져 간다. 이 책 저 책, 나이를 헤아릴수록 숫자만 불려 온 삶이 부끄러운 기록들이다.

지내놓고 보면 어린 나이라고 해서 자기 삶이 없었던 게 아니다. 초고령사회가 도래했다고 우리가 저절로 성숙한 사회를 누리는 게 아니듯 어떤 삶은 18살에도 무겁고 깊다. 18세 선거권 행사를 두고 준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일리가 없지는 않으므로 잘 준비하는 일에 힘을 쓸 때다.

하지만 자칫 고3이 되는 학생들을 향해서 준비가 덜 되었다고 손가락질할 일은 아니다. 스스로 삶의 굴곡을 결정하면서 성찰이 성숙을 이끄는 과정을 겪지 못했다면 책임은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우리 교육에 있다. 투표권은 누구를 뽑을까 결과만 묻는다. 후보들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가를 물으려면 18세 당사자들부터 자신이 살아온 과정에 눈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춘향이든, 백범이나 약산이든, 18세를 살아 낸 삶에 자신을 비추어 볼 힘을 갖추도록 도울 일이다. 그러면 다가올 4월, 나라를 구할 18세가 올 것이다.

임병구 인천 석남중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