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바다 생명의 바다, 황해] 13. 청 제국을 무너뜨린 '아편'…황해를 넘어 조선까지 휩쓸다
[문명의 바다 생명의 바다, 황해] 13. 청 제국을 무너뜨린 '아편'…황해를 넘어 조선까지 휩쓸다
  • 남창섭
  • 승인 2020.01.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륙·한반도에 마약 퍼뜨린 '가장 추악했던' 전쟁

 

▲ 임칙서가 아편을 폐기하는 장면

 

▲ 영국함대의 포격에 침몰하는 청국 전함

 

▲ 텐진조약 체결 장면

 

청, 서양상선 막으려 광저우만 개방
'차' 맛에 빠진 영국은 적자 심각하자
'아편 밀수출'로 평민도 중독시켰고
금지령 내린 청에 전쟁까지 일으켜
2차례 조약으로 유통·소비 '합법화'





광저우(廣州)의 주장(珠江)변에 있는 13행(行)거리는 오늘도 늘어선 상점과 사람들로 붐빈다. 이곳은 17세기에 서양 상선들에 의한 해상실크로드의 출발지로서 이름 높았다. 18세기에는 막대한 부를 창출하며 국제무역의 최대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지금도 상점 골목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유럽풍의 건물들은 당시 13행의 영화(榮華)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 거리는 중화제국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인 아편전쟁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아편전쟁은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부해왔던 제국이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영국에게 무너진 전쟁이다. 13행의 발전은 중화제국의 번영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했지만, 밀려드는 서양의 요구에 조공질서만으로 대응하다 무너진 현장이기도 하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명대의 해금정책을 깨고 밀려드는 서양 상선들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4곳에 세관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서양 상인들은 광저우의 월해관을 제일 많이 찾았다. 강바닥이 넓고 수심이 얕아 배를 접안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강희제를 이은 건륭제는 광저우만 개방하는 '일구통상(一口通商)'정책을 시행했다. 서양의 상선들이 중국 대륙을 속속들이 다니는 것을 금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서 없는 것이 없고, 더욱이 외국의 산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중화적 조공질서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비롯한 서양 상선은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중국과의 무역은 엄청난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중국에서 차와 비단, 도자기를 수입하고 모직물과 면화를 팔았다. 중국은 이를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차(茶)는 영국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영국의 차 수입은 중국에서의 수입물품 중 90%를 차지할 정도였다. 거래는 은(銀)으로 지불하였는데, 영국은 매번 엄청난 양의 은을 중국에 지불해야만 했다. 영국은 날로 무역적자가 심각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였다.

아편은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다. 한번 아편에 맛을 들이자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000 상자에서 1만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로 늘어났다. 고위관료에서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마약을 피웠다. 중국 전체가 마약굴이 되어 사람들을 피폐시켰다. 이제는 중국의 무역적자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편의 폐해가 심각해지자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삼아 광저우로 급파했다. 임칙서는 아편을 몰수하여 폐기시키고 부패관리들을 엄벌했다. 영국은 이를 빌미로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을 일으켰다. 결과는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던 중화제국 청나라의 치욕적인 패배였다. 중국은 홍콩을 할양하고 5개 항구를 개항하는 난징조약에 서명했다.

청은 아편전쟁에 지고 영국과 맺은 조약을 영국의 무력에 굴복한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조공질서의 주관자로서 오랑캐를 안무(按撫)하는 것으로 여겼다. 전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화친조약을 맺은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배층의 안일무사와 향락적인 생활이 이어졌다. <남경조약> 체결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보인다.

'대황제께서 영국인이 가족을 대동하여 대청국 연안지역의 광저우(廣州), 푸저우(福州), 샤멘(廈門),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5군데 항구에 기거하는 것을 은혜를 베풀어 허락하며 무역과 통상을 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한다.'

영국은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큰 이익을 보지 못하자 중국관리가 자국의 선원을 해적으로 몰고 국기를 내린 것을 핑계로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도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당한 것을 빌미로 전쟁에 참여했다. 청나라는 또다시 패배하고 도시 개방의 확대, 선교활동의 보장, 군함의 입항 허락 등을 담은 베이징조약에 서명했다.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도 물었다. 해안가만 오가던 서양의 배들이 중국 내륙까지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 황궁인 원명원은 산산이 부서지고 청나라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다. 허울뿐인 황실은 더 이상 나라를 지탱시킬 수 없었다. 멸망의 그림자가 내부에서도 서서히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톈진의 다구포대(大沽臺)는 바이강(白河)이 보하이만으로 들어가는 지점에 있는 요새다. 이곳은 2차 아편전쟁의 아픈 역사가 배어 있는 곳이다. 베이징과의 최단거리 해안가에 있는 이 포대는 밀려드는 서양 열강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청군은 고군분투했지만 8개 연합국의 화력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포대는 함락되고 무장해체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옛 포대를 복원하고 박물관을 세웠다. 과거 서구 열강에게 패한 쓰라린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듯 당시의 생생한 현장 사진을 유물들과 함께 전시해 놓았다.

 



[청의 패배로 아편 유입은 조선에도 … ]


한성 시내에만 아편판매소 44곳·1일 판매량 3만인분


아편전쟁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 연행사절(燕行使節)을 통해서 전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조선은 1차 아편전쟁의 결과를 청나라가 '영토의 상실 없이 종결된 전쟁'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인식했다. 청 황실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아편은 조선에서도 우려되는 문제였다. 청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조선에도 아편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주요 소비지역은 한성과 인천, 중국 접경 지역이었다. 2차 아편전쟁이 종결되고 아편의 유통과 소비가 합법화되자 조선도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인천은 청국의 상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곳이었다. 이들의 상업 활동은 아편의 유입과 확산을 가져왔고, 당시 언론에서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단속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아편을 공급하는 청국인은 처벌하지도 않았다. 청국의 상인들이 뇌물을 뿌렸기 때문이다. 양국의 정부도 아편의 판매를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는 자는 처벌한다고 상호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 <황성신문>을 살펴보면, 한성 시내에만 아편판매소가 44곳에 이르고, 1일 판매량이 3만인 분에 달한다고 하였다. 청나라가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아편의 공급과 판매가 합법화되자 그 피해가 고스란히 조선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 인천일보, INCHEONILBO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