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1. 의병좌통령 김창수(김구)와 인천·강화 (상)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 1. 의병좌통령 김창수(김구)와 인천·강화 (상)
  • 인천일보
  • 승인 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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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구, 일본군 중위를 처단하다

 

▲ 광복 직후 강화도를 방문한 김구 선생 일행. /이태룡 박사

 

▲ 해주감옥에 갇혀 칼을 쓴 김창수(김구·왼쪽 두 번째). /이태룡 박사

 

▲ 1890년대 해주읍성 모습. /이태룡 박사

 


동학 접주로 해주성 공략했으나 실패…안태훈 초청으로 청계동서 학문 정진
의병활동차 청국 삼도구 지역 향하다 서경장에게서 '의병좌통령' 첩지 받아
강계성 전투 퇴각 후 안악군 치하포행…행색 수상한 왜인 죽여 국모시해 복수


인천일보가 2020년 연중기획으로 인천과 경기지역의 주요 의병장과 의병활동을 발굴, 재조명하는 '찾아가는 인천·경기 의병'을 한국 의병연구의 대가로 학계에서 알려져 있는 이태룡 박사의 집필로 매주 월요일에 연재한다.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인 이태룡 박사는 1986년부터 의병연구를 시작한 뒤 경상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의병문학인 '의병가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태룡 박사의 저서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1~4권)과 <한국 의병사>(상·하권)은 의병연구의 역작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지금까지 2200여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 공개해 포상 신청을 한 바 있다.


1895년 10월8일(음력 8월20일), 일본 군경과 자객이 조선의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참살하고, 그 시신을 불태운 만행에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국수보복 國讐報復)'는 상소가 빗발치고, 의병을 일으켜서 일제와 그들 앞잡이를 처단해야 한다는 방(榜)이 나붙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충남 회덕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은 문석봉(文錫鳳)이었다.

문석봉 거의(擧義)는 을미왜란 이후 토왜의병(討倭義兵)의 기폭제가 되어 평북 강계에서 김이언(金利彦), 김창수(金昌洙·김구金九의 본명), 김규현(金奎鉉·일명 봉현奉鉉)이 이끄는 의병투쟁이 이어졌고, 이어 전국 각지에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팔봉접주에서 의병좌통령 되다
'갑오년(1894) 9월경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황해도에도 양반과 관리의 압박이 삼남에서 향응하라는 경통이 잇따라 도착하여 우리 15인의 접주를 위시하여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맨 처음 총집결 장소로는 포동시장인 죽천장(竹川場)으로 정하고 각지에 경통을 보냈다. 나는 팔봉산(八峯山) 아래 산다고 해서 '팔봉'이라는 접명(接名)을 짓고, 푸른 비단에 '팔봉도소(八峯都所)' 넉 자를 크게 쓰고, 표어로는 '척왜척양(斥倭斥洋)' 넉 자를 써서 높이 걸었다.'(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47쪽)

이때 김창수가 이끈 동학농민군은 산포수를 중심으로 총을 지닌 자가 700여명이었다고 하니, 상당한 규모였다. 접주들의 최고회의에서 김창수를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을 맡긴 것에 대하여, "나를 선봉으로 임명한 것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평소에 병법을 연구하였고, 또한 나의 접(接)이 산포수로 잘 무장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동학농민군의 해주성 공격은 일본군의 신무기 연발총(기관총)의 위세에 눌려 패배하고, 김창수는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安泰勳·안중근의 부친)이 보낸 밀서에 '나를 치지 않으면 나도 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밀약을 한 후 구월산 패엽사(貝葉寺)로 들어갔다. 그 후 안태훈의 초청을 받아 청계동으로 가서 후대를 받고, 후조(後凋) 고능선(高能善)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넓혀 나가던 중,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을 만나 의기투합, 참빗장수 행색으로 북행에 나서게 되었다.

그와 김형진이 강계 인근에 이르자 벽동 사람 김이언이 청국의 지원을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자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김형진을 먼저 삼도구로 보내고, 뒤이어 그도 뒤따랐다. 삼도구 지역을 눈앞에 두고 청국 무관 일행을 만나게 되었는데, 김창수는 품속에 지니고 있던 '취지서(趣旨書)'를 보였다.

"痛彼倭敵與我不共載天之讐(통피왜적여아불공재천지수)"
통탄할 바, 저 왜적은 나와 함께 세상을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일본인이 어째서 그대의 원수인가?"
"일본은 임진년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국가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지난달에는 우리 국모를 불태워 죽였기 때문이오."

김창수와 필담을 나눈 그는 청국 금주(錦州) 사람으로 청일전쟁 때 사병 1500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1000여명과 함께 전사한 서옥생(徐玉生) 장군의 아들 서경장(徐慶璋)이었다. 서경장은 김창수에게 '의병좌통령(義兵左統領)'이라는 첩지를 주고, 금주로 가면 사병 500여명이 있으니, 함께 거의를 하자고 하였으나 김형진과의 약속 때문에 사양하고 삼도구로 가서 김이언을 만난 것은 1895년 9월(음력)이었다.

김이언은 강계·벽동·위원·초산 등지의 포수와 압록강 건너 청국의 포수까지 모집하여 그 수가 300여명이었다. 거의 명분은 '국모가 왜구에게 피살된 것은 국민 전체의 치욕이니, 가만히 앉아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창수와 김규현은 300여명의 포수만으로 곧바로 강계성을 공략하자고 했으나 김이언은 야간에 고산진을 쳐서 무기를 빼앗아 무기가 없는 700여명의 의병들을 무장한 후 강계성을 점령해야 한다면서 고산진을 향해 나아갔다. 김이언 의진은 예상한 대로 손쉽게 고산진을 점령하고, 빼앗은 무기로 빈손으로 종군한 의병들을 무장시킨 후 강계성으로 진군했으나 인풍루(仁風樓) 밖 10리 지점에서 대포까지 동원한 관군의 공격에 많은 의병들이 살상된 채 퇴각하고 말았다.

그 후 김창수는 귀향하여 부모를 뵌 후 김형진 등과 황해도 장연에서 산포수를 모아 1896년 설날을 기해 거의하여 해주부를 공략한 후 청병과 함께 한성(경성)으로 진공하고자 했으나 거사 직전에 김계조(金啓祚), 백낙희(白樂喜), 전양근(全良根) 등 과거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피체되는 바람에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김창수는 청국 금주의 서경장을 만나 거사를 도모하기로 하고, 안주에 다다르니, '단발정지령'이 내렸고, 삼남지방에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출국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용강군을 거쳐 안악군 치하포로 내려왔다.

◆의병좌통령으로서 일본인 처단
1896년 3월8일(음력 1월25일), 나룻배가 빙산에 막혀 고생 끝에 밤중 무렵 황해도 안악 치하포(治下浦) 어느 주막에 찾아든 김창수, 금세 이튿날 새벽이 되어 아침밥상이 들어왔다. 그때 단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자가 나그네와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김창수 눈에는 일본인처럼 보였다. 특히 흰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여 매우 의심스러웠다.

'이곳은 진남포 맞은편 기슭이므로 매일 여러 명의 왜인이 본래의 행색대로 통행하는 곳인데, 저놈은 보통 장사치나 기술자 같으면 조선사람으로 위장했을 리가 없지. 우리 국모를 살해했다는 미우라(三浦梧樓)가 아닐까? 미우라가 아닐지라도 미우라 공범일 것이다. 여하튼 칼을 차고 숨어다니는 왜인이 우리나라와 민족한테는 독버섯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자.'

김창수는 밖에 서 있던 일본인을 '돌과 나무로 타격하고, 나무로 연타해서(石打木擊 以木連打 석타목격 이목연타)' 죽였다. 소지품을 조사해 보니, '스치다(土田讓亮)'라는 자로 일본군 육군 중위(일본 사전에는 상인으로)였다.

김창수는 주막에 있던 사람들에게 '의병좌통령' 첩지를 보이고, "국모보수(國母報讐)를 위해 이 왜인을 죽이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고 글을 써서 방을 붙이게 하였다. 동장에게 "안악군수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라"하고, 일본인이 소지한 800냥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시신은 강물에 버리게 한 후 황해도 신천으로 향했다.

원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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