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석동 굴막 2012.

인천의 굴은 치열한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은 먹거리다. 용유도, 무의도, 영종도 등에서는 오래전부터 큰 돌을 갯벌에 깔아놓고 그 위에 굴이 자라게 하는 식으로 양식을 해왔다. 그렇게 자란 굴을 채취하자마자 배로 북성포구와 만석부두로 실어 왔다. 두꺼운 껍질을 까서 팔아야 했기 때문에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굴은 '굴까기'라는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냈다. 6·25 전쟁 이후 남쪽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에게는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생업이 되었다.

매년 늦가을부터 한겨울 동안 만석동 아낙네들의 손놀림은 그 어느 때 보다 바빴다. 시간과 이동 노동의 품을 아끼기 위해 만석부두 두산인프라코어 공장 담에 이른바 '굴막'으로 불리는 가건물을 지어서 한곳에 두어 명씩 들어가 굴을 깠다. 한창 많을 때는 40여 개의 굴막이 들어섰다. 50년 전 굴을 까기 시작했다던 젊은 새댁은 이제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다. 고왔던 손은 부러지고 일그러져 만신창이가 되었고, 굴막도 그의 손처럼 늙어갔다.

달콤하고 짭짤한 굴 맛 속에는 고향을 떠나와 인천에 정착한 실향민들의 고단한 삶이 깊게 배어 있다. 황해도 등지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된 30여 채에 달하던 만석부두 굴막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는 만석고가교 아래에 알루미늄새시 틀로 만든 새 굴막으로 이전했다.
그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과 기억은 인천의 또 다른 유산이다. 굴막 주위로 수없이 쌓였다는 굴 껍데기를 담은 비닐 포대 등의 풍경은 이제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굴 껍데기처럼 단단한 삶을 살아온 그들의 흔적을 담은 작은 기록관 하나가 제철이 되면 어디든 굴 냄새가 퍼졌다는 만석동 골목 어디쯤 있었으면 하는 것은 나만의 바람일까?

/포토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