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길영희(1900.11.30~1984.3.1, 인천중·제물포고 초대교장) 선생님과의 만남은 2003년 어느 봄날이었다. 광양제철중학교에 무감독시험을 도입하기 위해 선진학교인 제물포고등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교문을 지나 학교에 들어가니 두루마기를 입고 계시는 길영희 선생님 동상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물포고의 무감독시험은 1956년부터 수십 년 동안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길영희 선생님은 정직성과 자긍심 신장을 교육철학으로 삼고, 무감독시험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나는 초대교장으로서 2014년 인천포스코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인천을 대표하는 명문사학의 초석을 마련하고자 제물포고를 다시 찾았다. 1960~70년대 평준화 이전 제물포고의 맥을 잇는, 인천을 대표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교장 선생님의 안내로 학교를 돌아보고 길영희 선생 추모문집(제7정판)을 발견하고 한 권을 선물로 받아 왔다.
추모문집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육자들의 표상이 되는 길영희 선생님에 대한 글들로 가득했다. 400쪽 분량의 추모문집에 담긴 80여명의 지인과 제자들이 쓴 글, 선생님의 교육철학, 실천 사례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자들에게 감동

을 주기에 충분했다. 2017년 가을에 선생님이 잠들어계신 충남 예산군덕산면 둔리(가루실) 묘소를 참배하고 '저에게도 선생님 같은 지혜를 주십사' 기도했다. 선생님께서 노년에 생활하셨던 가정집과 생전에 교육을 펼치시던 가루실 농민학교를 둘러보았다. 주인 없는 학교 운동장은 잡초가 무성하였고, 교실 안의 역사를 품고 있는 사진액자 속 선생님은 나를 반겨주셨다.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손수 지은 가루실 농민학교와 집을 오가며 거니셨을 숲길을 따라 걸었다. 선생님은 매일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주변의 나무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을까, 나아가 오늘의 교육자들은 학교와 가정을 오가면서 어떤 마음을 가질까 하는 질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지난 2018년 8월에는 사립학교 교장단 회의에 참석해 나에게 가장 값진 보물을 선물한 길영희 선생 추모문집을 소개하고 일독할 것을 권했다. 오늘날처럼 혼란스러운 교육현장에서 선생님 같은 교육 선각자의 부재가 아쉽기만 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깨어나셔서 후손들에게 교육의 나아갈 길을 찾아주시기를 기대해 본다.

선생님은 한국 교육문제에 대한 처방이라는 글에서 '대입제도는 선다형의 국가고시제도만으로는 미흡하다. 대학의 자율재량에 맡겨야 한다. 지육과 덕육교육에 힘쓰기 위해 정권과 교권을 분리하여 한국의 교육을 정치가의 손에서 떼어 교육자의 손에 넘겨야 한다.'고 질타하셨다. 오늘날 우리 교육을 정치 논리로 좌지우지하는 세태를 미리 예견하신 것이리라. 부끄럽고 면목이 없다. 선생님께서 실천하신 무조건적 제자 사랑과 교육철학을 왜 우리는 후손들에게 펼치지 못할까?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선생님께 너무도 송구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사는 있지만 스승을 찾기 힘든 오늘날, 모든 교육자와 학생들이 선생님의 교육철학과 실천사례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선생님의 지혜를 공유하는 공감의 장을 만들어 인공지능(AI)을 지배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는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를 답습하는 교육만으로는 미래 인재를 키울 수 없다. 학생 스스로 생각하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세상을 바꾸는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 이에 나는 학부모 생각을 바꾸지 않고서는 1%도 자녀를 바꿀 수 없다는 마음으로 지혜공유학교를 세워 학부모와 지혜를 공유한다. 선생님의 교육철학과 실천이 나를 인도한다. 선생님! 이 땅의 교육자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미래에 대비할 혜안을 찾아주시며, 제자들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안종진 지혜공유학교 꿈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