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의 '천적'으로 불렸던 권중희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그는 1970년대 말 이화여대 앞에서 기원을 운영했다. 한창 바둑에 재미를 붙일 때라 몇번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는 조용하고 평범한 40대였다. 때문에 권중희가 1992년 안두희를 폭행한 뒤 경찰에 잡혔을 때 '기원 아저씨'를 떠올리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는 취재차 찾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속이 타니 담배 좀 달라"고 말했다. 그의 인생 전환은 '안두희가 미국으로 이민을 기도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데서 비롯됐다. 어릴 적 '백범일지'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권중희는 1983년 돌연 기원을 그만두고 안두희 추적·응징에 나선다. 13년에 걸친 '추적자'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계속 거처를 옮기는 안두희를 귀신같이 찾아내 결국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나 김구를 살해하라는 암묵적인 지시를 받았다"는 증언을 얻어냈다. 백범 피살 당시부터 떠돌던 이승만 개입설을 안두희가 인정한 최초의 증언이었다. 하지만 안두희는 곧바로 '폭행에 의한 진술'이라고 번복해 권중희가 얻어낸 증언은 공인받지 못했고, 권씨는 폭행 혐의로 두차례나 옥살이를 했다. 권씨는 "안두희가 경무대에 갔을 당시 상황을 설명한 대목은 도저히 꾸며낼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경무대 접견실 배치와 마신 차 종류까지 뚜렷이 기억했다. 그런데도 폭행이 있었다는 이유로 증언을 정밀 검증하지 않은 것은 정부와 과거사위원회의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권중희 추종자인 박기서에 의해 몽둥이로 살해됐다. 안두희 빈소에는 단 한 명의 조문객도 없었다. 권중희는 뜻밖에도 안두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권씨는 "안두희에게 보약을 먹여서라도 오래살게 해 역사적 진실을 끝까지 파헤쳐야 했는데"라고 말했다.

권중희는 안두희가 죽은 뒤에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안두희를 추적하는 동안 '궁핍'이라는 또 다른 천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권씨는 친척 소유의 농장(경기도 양주) 소우리를 개조해 만든 단칸방에서 지내다가 2007년 11월 세상을 떠났다.(향년 71세, 본관 안동)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의인(義人)'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돈키호테나 테러범쯤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권중희는 민족지도자를 살해했음에도 곧바로 사면받고 군 납품업체를 운영하며 편히 살아온 안두희에게 '임자'가 있음을 일깨워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새삼스레 권중희를 떠올리는 것은 이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