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한반도'로 존재감 … 그렇게 밀려들어온 외세

 

 

▲ 소청도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17세기 초까진 아예 그려지지 않거나 섬으로 표시
이후 가장 정확히 그린 '당빌 지도'가 직접적 안내




서양 고지도에 한국이 어떻게 표기돼 왔는가에 대해서는 그간 적지 않은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동해-일본해 논쟁과 독도 영유권 분쟁을 계기로, 서양 고지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지도 속에 동해 표기와 독도의 영유권이 어떻게 표기돼왔는가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돼 왔다. 반면에 황해바다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듯하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서양지도에 한국은 아예 그려지지 않거나 섬으로 표시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1595년에 제작된 오르텔리우스(A. Ortelius) 지도를 보면 한반도는 COREA INSVLA라 표기해 섬으로 그려졌다. 1625년 제작된 혼디우스(J. Hondius)의 동아시아 지도는 한반도를 길쭉한 모양으로 그려놓고 라틴어로 "한국은 토착민들에게서는 카올리(Caoli)라 불리고 일본인들로부터는 코라이(Corai)라 불리는데 한국이 섬인지 대륙의 일부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기술했다.

혼디우스에 이어 한반도를 실재에 가깝게 그린 지도는 1665년 마르티노 마르티니(M. Martini) 신부에 의해 제작됐다. 그는 당시 해양제국이었던 네덜란드 지도제작술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중국대지도(Atlas Sinensis) 속에 반도로 그려진 한반도를 그려놓았다. 반도의 모양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로 간주되었다. 마르티니의 지도 이후 동아시아와 중국, 일본을 그리면서 한반도가 포함된 지도가 많이 제작됐지만, 가장 정확한 지도가 다시 제작된 것은 1세기 이상 지난 1737년 당빌(D'Anville)에 의해 제작됐다.

그리고 바로 이 당빌의 지도에서부터 황해바다와 그곳의 섬들이 서구인들의 눈에 포착돼 지도상에 표기되기 시작했다. 지도를 자세히 보면 옹진반도 앞에 있는 두 개의 섬이 선명하게 표시돼 있다. 그 가운데 위에 있는 섬이 백령도인데 'Peling Tao'라고 표시돼 있다. 당빌의 지도는 이후 1세기 중국과 한국에 대한 서양인들의 접근의 가장 직접적인 안내지도가 됐다고 한다. 영국인 지도제작자인 톰슨이 1817년 발간한 '한국과 일본' 지도도 당빌이 그린 지도를 그대로 본떠 제작되었다.

대항해시대 미지의 세계를 찾아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나섰던 서양의 상선과 군함들이 이런 지도를 보고 동아시아를 찾아왔고 그중 일부는 황해바다로 올라왔다. 1816년 영국 암허스트(Amherst) 사절단의 일원으로 소청도와 마량진에 상륙했던 리라(Lyra) 호의 함장 바실 홀(B. Hall)은 성경을 건네주고 갔다. 1832년 7월, 바실 홀 일행이 제작한 황해바다의 해도를 보고 영국 상선 로드 에머스트(Rod Emerst) 호가 백령도 근해에 도착하기도 했다.

1846년에는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3척이 프랑스 천주교 신부인 앵베르(Imbert), 모방(Maubant), 샤스땅(Chastan) 살해사건(己亥邪獄)에 대한 보복과 배상을 요구하며 서울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한강 하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1856년 7월 프랑스의 게랭제독은 정한론을 주장하면서 조선 침공을 위한 수로정찰로 경기만 일대를 2개월간 조사하고 돌아갔다. 1866년에는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독일 등 구미 제국의 함선들이 조선을 개항시킬 목적으로 한때 조선 여러 곳의 해안에 상륙하였으나 쇄국을 완강하게 고수한 조선정부의 태도로 인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런 가운데 1866년 3월 프랑스 베르뇌(Berneux) 주교를 비롯한 신부 8명이 대원군에 의해 처형되는 병인사옥이 일어났다. 이미 십여 년 전에도 기해사옥으로 세 명의 천주교 신부가 참수된 것에 항의하려다 실패했던 프랑스는 즉각 군함을 파견했다. 이미 중국과 면한 황해바다에는 영불 연합군 함대가 1859년 나타나 청조를 굴복시키고자 텐진항을 통해 상륙해 북경을 함락시킨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서세동점의 강파른 전개 속에 연이어 1866년 한반도에도 전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목숨 걸고 선교항로 연 김대건 신부서양에 알려진 첫 한반도 지도 제작]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아시아 대륙의 끝, 극동에 위치한 한반도를 섬인지 대륙의 일부인지 분명치 않다고 여기던 1840년대 황해바다를 가로지르며 목숨을 건 천주교 포교활동을 전개한 조선인 사제가 한 명 있었다.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w) 신부가 바로 그다. 조선 천주교는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립되었으나 조선정부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이후 국경 감시가 엄격해지자 조선교구와 외부와의 연락이 사실상 두절됐다. 이에 로마교황청 마카오 대표부에서는 조선과의 황해 횡단 선교항로 개척을 6년간 마카오에서 신학생으로 있던 김대건에게 맡겼다.

1845년 4월30일, 김대건 부제는 11명의 신자와 예비신자들을 사공으로 삼아 제물포를 출발해 배를 몰고 상하이로 향했다. 죽을 고생을 다한 김대건 일행은 6월4일 마침내 상하이에 도착했다.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쓴 김대건은 8월17일 상하이 푸동에서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타고 온 배를 수리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태우고 8월31일 상하이를 출발해 조선을 향했다. 이들은 9월28일 제주도에 도착한 뒤 10월12일 충남 강경 황산포구에 내리는데 성공했다.

서울에서 은밀히 포교활동을 전개하던 김대건 신부는 황해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새로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를 받는다. 이에 김대건 신부는 1846년 5월14일 마포에서 어선을 타고 강화도와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로 향했다. 백령도 해상에서 중국 어선을 통해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조선지도 2장 등을 전달했다. 그러나 6월5일 또 다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돌아오다가 조선 관리들에게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돼 3개월 여의 옥중생활과 문초를 받은 끝에,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황해 선교 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실한 신앙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지리학 지식과 인류학적 소양을 가지고 제작한 <조선전도(朝鮮全圖)>를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1845년 서울에서 제작해 프랑스 선교사 편에 건네준 <조선전도(朝鮮全圖)>는 서양에 알려진 한국인이 제작한 첫 한반도 지도로 1861년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6년 빨리 제작됐다.

김대건 신부의 황해 횡단 선교를 기념하기 위해 백령천주교회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장돼 있고 소청도에는 김대건 신부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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