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현숙의 배다리 이야기] 13. 배다리 인문강좌 '왜 우각리인가'
[곽현숙의 배다리 이야기] 13. 배다리 인문강좌 '왜 우각리인가'
  • 여승철
  • 승인 2019.12.10 00:05
  • 수정 2019.12.09 2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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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가장 먼저 선교문화가 스며든
쇠뿔 닮은 이곳은 '쇳불' 다룬 곳일 수도

 

▲ <왜 우각리인가> 소책자 표지.


지난 6월 아벨 다락방에 배다리 인문강좌로 오광철 원로 언론인을 모셨습니다. '왜 우각리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해주신 내용 중에 말씀을 발췌했습니다.

"창영동 42번지 선교본부 일대를 중심으로 고개의 형국이 흡사 구부러진 소의 뿔과 비슷하다고 해서 쇠뿔고개라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자로는 소 우(牛)에 뿔 각(角)을 빌어 '우각리'라고 했다. 오늘의 창영교회와 인천세무서에서 전도관 올라가는 언덕진 도로가 바로 그 쇠뿔고개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와는 전혀 다른 주장이 있어 주목받고 있다. 즉 금곡동(金谷洞)과 연관한 설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쇠뿔'이 아니라 '쇳불'이라는 것이다. 즉 '쇠를 녹이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농경지와 연결되는 우각리 일대에는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쇳불고개가 사실이라면 중대한 논고가 아닐 수 없으며 앞으로 더 고증돼야 하리라 여겨진다.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경성으로 가려면 인천과 경성을 왕래하는 작은 증기선을 타고 강화를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수로이거나, 아니면 우각리의 큰길을 따라 경성으로 가는 육로로 갈 수밖에 없었다. 청일전쟁 전에 청나라 세력이 강했을 때 경성에 주재하던 청나라의 조선총독이라 할 수 있는 '원세개'는 한강 해운을 독점했는데, 육로 또한 청의 세력 아래 장악하려고 청나라 북부 지역의 마차를 수입하여 여객과 화물을 수송하였다. 저렴하고 편리하기 때문에 여전히 즐겨 이용하였다.

이외의 방법은 조선말을 타거나 귀족들이 사용하던 가마를 타거나 걸어가는 방법이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 세력이 위축되어 이 교통기관이 없어진 후에 일본인들의 인력거가 등장했으나 도로가 불량하여 이용가치는 충분하지 못했다. 하여 승객들은 조선말을 타고 가는 것을 선택했었다. 이른 아침에 방울소리 울리며 조선 마부는 승객을 찾아 말을 끌어오고, 말방울소리가 그 아침에 떠날 여행객의 단잠을 깨웠다.

이렇게 육로로 서울 가는 신작로인 우각리 일대는, 자연스레 인천에서 서구문화가 먼저 찾아와 정착한 곳이 되었다.

그 첫째로 1892년 4월30일 존스 선교사에 의해 영화학교가 개교했으며, 둘째로 1905년 주한 초대 미국 공사를 지낸 알랜 선교사의 별장이 서고, 셋째로 1897년 경인철도 기공식을 거행한 후 개통, 넷째로 1907년 인천에서 최초인 공립학교(인천 창영 초등학교)가 개교했다.

아무튼 존스 선교사는 1900년대에 들어 이미 건립된 내리 예배당이 증가하는 교인들로 협소해지자 새로운 교회를 건축할 계획을 하게 된다. 우선 예배당과 주택을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했다. 그러나 200명 수용 정도의 작은 예배당이던 에즈머리 예배당도 늘어나는 교인들을 모두 입장시킬 수 없어, 1901년 크리스마스에 공사가 미처 끝나지 않은 내리 예배당으로 복귀하면서 영화학교에서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이듬해 에즈버리 예배당과 목사관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어 1905년 우각리 42번지에 여선교사들이 생활할 건물을 비로소 신축하게 된다. 지금도 고풍스런 르네상스식의 아름다운 건물로 남아있으니 이것이 오늘날 유형 문화재 18호의 선교사 저택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드리지만 합숙소라는 명칭은 격에 어울리지 않고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그곳은 분명 인천 인근과 앞바다를 상대로 활약한 선교본부였다. 특히 오늘의 강화지역에서는 개설된 지 100년이 넘는 역사적인 교회들이 다수 있으며 이들 교회는 우각리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러므로 선교본부라는 사실적인 표현을 사용했으면 하는 요청을 한다. 유서 깊은 쇠뿔고개,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각로는 훌륭한 문화재이다" 라고 말씀을 맺으십니다.

선교본부에 대한 증언과 경인가도가 형성된 과정까지 귀한 말씀을 강연 소책자로 만들었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아벨서점에서 드립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 대표적으로 일본 치하의 학교에서 민족정신을 배울 리 없는 학생들 스스로 일어선 3·1운동이 밥상머리 교육에서 일어났음을 볼 수 있고, 이길용 기자와 강재구 소령 같은 행동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일은 저변에 깔린 우각로에 선민의 정신이 잉태되어 흐르던 사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오늘의 '어진 내'이길 바랍니다.

/곽현숙 아벨서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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