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후기 화가 허유(許維·1807~1892)가 만년에 기거하던 화실인 진도 운림산방.

 

▲ 새얼역사기행 탐방단이 진도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전남 신안군 압해읍과 암태면을 연결하는 천사대교.
▲ 전남 신안군 압해읍과 암태면을 연결하는 천사대교.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 주최 제 34회 새얼역사기행이 지난 10월31일~11월2일 2박 3일간 전라남도 목포, 신안, 진도 일원에서 진행됐습니다. 소중한 역사문화 자산과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역사기행탐방단을 직접 인솔해 현지를 다녀온 지용택 이사장의 탐방기를 싣습니다. <편집자 주>

새얼문화재단이 매년 치르는 역사기행이 어느덧 34회를 맞이하여 올해는 신안(新安), 진도(珍島), 목포(木浦)를 2박 3일간 다녀왔다. 1969년 1월1일부터 무안군의 도서지역만을 따로 떼어내 신안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신안군의 1004개 도서 중에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인도가 72개, 무인도가 932개 섬으로 인구는 4만4000여명에 이른다. 바다와 어우러진 섬들은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서민 스스로 만들어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정약용 형제가 신유박해(辛酉迫害·1801)로 인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전남 강진으로, 둘째 형 손암 정약전(巽庵 丁若銓·1758~1816)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된다. 정약용은 다산초당(茶山草堂) 언덕에 올라 흑산도를 바라보며 눈물과 한숨으로 형을 그리워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6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한국 최초의 어류 도감이라 할 수 있는 <자산어보(玆山魚譜)> 3권을 집필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 지역에 두문사객(杜門謝客·문을 닫고 손님도 받지 않으며 공부만 하는) 선비 장덕순(張德順)의 도움과 협력 그리고 현지 어부들의 경험에서 얻어낸 지식이 손암에 의해서 정리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순박한 어부들의 땀으로 뭉친 경험에서 묻어난 지혜가 아니었다면 <자산어보>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저자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서신에 흑산도라고 하면 얼마나 험하길래 흑산이냐고 걱정하실까봐 '흑'자의 뜻이 담긴 자(玆)를 사용하여 자산도라고 했기 때문에 흑산어보가 아닌 자산어보가 된 것이다.

▲천사대교와 인천대교의 주경 간 폭

필자는 지금 압해도(押海島)와 암태도(巖泰島) 사이를 연결하는 천사대교(千四大橋)를 버스로 지나고 있다. 15년 전이었던 2005년 6월 인천대교(2009년 10월 완공)의 주경간 폭을 넓히기 위해 인천시민들이 뜻을 모으고 한편으로 항만업계 종사자, 사용자, 노동자, 순수한 시민들이 단결하여 우리의 의지를 정부에 강력하게 전달했다. 비록 공사가 6개월 이상 지연되긴 했지만 결국 주경간 폭을 확장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천사대교를 건너면서 당시 생각이 들어 감개가 무량했다.

인천대교의 주탑 높이는 230.5m(63빌딩 높이, 세계 5위), 천사대교는 125m, 인천대교의 주경간은 800m, 천사대교는 신안군 소재 1004개 섬을 상징하는 1004m이다. 인천대교의 교량 길이는 18.38㎞(국내 최장 길이)이고, 천사대교는 7.22㎞에 이른다. 인천대교는 6차선, 천사대교는 2차선(일부 구간 3차선), 예산은 인천대교가 2조4234억원이었고, 천사대교는 5814억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천사대교의 주경 간 역시 처음 설계 당시에는 3000t급 정도의 배가 통과할 수 있는 규모였다가 목포해양대학 연구소에서 앞으로 중국과의 교역을 생각하고, 선박의 대형화가 세계적 추세인 만큼 5만t급 선박이 다닐 수 있는 규모로 설계를 변경하여 예산도 따라서 대폭 증액되었다.

다리의 기능은 주경 간 폭이 얼마나 넓고 주탑의 높이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그 가치와 용도가 결정된다. 인천대교는 주탑이 높기에 인천항에 대형 크루즈 선박이 들어올 수 있지만, 부산항은 규모가 크더라도 입항하지 못한다. 인천시민의 선견지명과 그 뜻을 받아준 정부의 정책 변경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대교의 주경간 폭은 천사대교보다 204m가 적다.

▲일제에 빌붙은 지주들과 암태도 소작쟁의

아, 암태도!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은 겉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했지만 침탈의 내용은 더욱 조직적으로 변모했고, 심해졌다. 암태도 소작쟁의(1923~1924)는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낡은 제도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항쟁으로 거듭난 사건이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비호를 받아온 악덕 지주들은 보통 그해 수확량 중 50%정도를 소작료로 받던 관례를 깨고, 60~80%로 인상하였다. 암태도 농민들은 분연히 일어나 이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편파적으로 소작인들을 구속하였고, 아사투쟁(餓死鬪爭)에 나서기로 결의한 암태도 주민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13명 중 5명이 실형에 처해졌다. 근 일 년여 동안 목포 검찰청과 법원을 드나들면서 이들이 당한 고생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1920년대의 암태도 소작쟁의는 서해안의 여러 섬인 자은도, 비금도, 도초도, 하의도 등에서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암태도 도민들의 치열한 항거 덕분에 소작료를 논 40%, 밭 50%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에 대해서는 송기숙 선생의 소설 <암태도>에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당시 7할이 넘는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일반적이었던 5할의 세율보다 낮춘 것이다. 이것은 암태도 농민만의 승리가 아니라 전국 농민의 승리이며 그 뜻은 민족의 저항정신으로 승화되었다. '암태도 농민 항쟁 사적비'가 선착장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데, 이 암태도 농민항쟁에 대한 설명은 하늘고등학교 교감 이영종(역사 전공) 선생의 설명으로 더욱 빛났다. 비석에는 쟁의에 앞장섰던 서태석(1885~1943)을 비롯한 동지 43명의 존함이 새겨져 있고, 비문은 작가 송기숙 선생의 작품이다. 비문을 읽는 데 참으로 마음이 짠했다. 과거 그분들의 처참한 생활과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진도에 새겨진 역사의 숨결

진도는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면적으로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인천의 강화도는 4위, 영종용유도는 7위, 그리고 교동도는 18위이다. 진도는 비록 인구는 3만1000여명(2018년 기준 인구)에 불과하지만, 섬 천체가 노천(露天) 역사박물관이며, 미술관, 서예도서관, 또 항몽 저항의 현장이며 유형(流刑)의 고장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 때 전라감사는 진도에 유배된 사람이 너무 많아 식량이 부족하다고 조정에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다. 귀양 온 수재, 천재들이 조정에 출사할 길이 막힌 나머지 그 열정과 고뇌 속에서 삶을 승화시킬 방법을 서화에서 찾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가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고 제자인 소치 허유(小痴 許維·1807~1892)를 극찬했으며 소치의 아들 미산(米山), 손자 남농(南農) 3대가 이룩한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정수(精髓)가 담긴 현장이다. 운림산방의 주변 경관을 새롭게 단장하고, 내용도 정성껏 새롭게 설치한 점이 돋보인다. 이곳의 분위기에 취하여 동행과 이야기하면서 공부해 나가면 현장에서 얻는 감동 못지않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용장산성(龍將山城). 고려무신 정권이 키워낸 군대 삼별초(三別抄)는 1270년(원종 11년)에 원나라에 투항하는 고려 정부를 반대하여 배중손, 노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강화를 탈출해 진도에서 9개월여를 버티다가 제주도로 후퇴해 이곳에서 2년간 1만의 여몽 군대에 치열하게 항쟁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진도에서는 용장사(龍將寺)를 중심으로 주위를 산성으로 만들어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백성들 수천 명이 몽골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는 사실은 그 역사의 현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준다. 동시에 이것은 삼별초만이 아니라 백성 전체가 싸웠다는 증거가 된다.

충무공벽파진전첩비(忠武公碧波津戰捷碑). 명량해협의 길목이며 오랫동안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한 포구 벽파진 그 뒤의 언덕에 세워진 전첩비에는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로 시작되는 글이 소전 손재형(素? 孫在馨·1903~1981)의 정성스러운 소전체 글씨가 돋보인다. 비는 우람하고 역사의 숨결이 피를 토하듯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남도의 인물을 보며 인천을 다시 생각하다

마지막 날, 목포(木浦)에 도착했다. 목포는 1940년 8만의 인구로 부산, 인천과 비슷했는데 지금은 25만여명의 시민으로 부산, 인천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목포에는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안·목포 시민의 긍지인가! 건물도 조용하지만 힘이 있어 보였고, 이층 건물에 설치한 내용도 거부감 없이 조화롭게 되어 있다. 기념관을 나오면서 사람을 키워야 한다. 굵은 사람을 배출해야 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인천에는 토지개혁과 산림정책에 앞장섰던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1899~1959) 선생이 계시고, 4·19학생혁명의 민주정부 시절 내각 수반을 맡았던 운석 장면(雲石 張勉·1899~1966), 한국 고미술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 현대 서예의 기틀을 세운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1911~1976), 한국 10대 서예가의 한 사람인 동정 박세림(東庭 朴世霖·1924~1975),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군함 함장 신순성(愼順晟·1878-1944),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운산 최영섭(雲山 崔永燮·1929~ ) 등등 인천에도 내로라할 만한 거목이 많은데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지만 지면 관계상 줄인다. 항상 사람이 크는 고장 인천, 그런 사람들의 텃밭이 되는 협동사회를 꿈꿔왔다. 마저작침(磨杵作針)의 원(願)을 가슴에 품으면 이룰 수 있다. 원은 그저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한결같은 정성이기 때문이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