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주의에 저항하다,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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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의 총성 앞에 민주사회를 이룩하는 일보다 먼저인 것은 없었다. 70년대 미술사에 반기를 들며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고자 했던 미술 소집단 '다무그룹'은 군사정권 당시 민주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총 대신 붓을 들었다. 중앙대학교 출신 청년 작가 일곱은 '다무그룹' 활동을 통해 사물과 물성의 관계를 연구하기도 하고, 민중미술 활동을 하며 저항적인 작품을 내걸기도 했다. 80년대 활동했던 민중미술 소집단들과는 다른 색깔을 보였던 '다무그룹'을 소개한다.

▲ 정진석作 '십장생'(1983). 정 작가는 작품의 일부를 검게 칠해 1980년대의 은폐와 억압을 장치적으로 표현했다. /사진제공=홍선웅

 

▲ 홍선웅作 '상황과인식'(1982) /사진제공=홍선웅

 

▲ 경기도미술관에서 연이어 열리고 있는 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 전시의 미술 소집단 다무그룹의 아카이브 자료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1980년 미술 획일화에 맞서 창립
재료 다양성·구성 현장성에 초점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양분…해체





시점·시점_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

▶기간 : 2019년 10월29일~2020년 2월2일
▶장소 : 경기도미술관 2층 기획전시실(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 화랑유원지 내)

다무그룹은
'다무그룹(이하 다무)'은 1980년에 창립됐다. 7명의 중앙대 출신들로 구성된 이 집단은 당시 모노크롬적 사고에 치우친 학풍에 크게 반발하며 조직됐다. 이들은 새로운 형식과 실험, 동시대적 이념과 정신의 실천적 정립을 간절히 원했다.

무엇보다 70년대를 거치며 우리나라 미술의 제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모더니즘 미술의 획일화된 형식주의는 넘어서야할 벽으로 여겨졌다.

다무는 '있는 것과 보이는 것'을 주제로 하나는 재료의 가능성을 최대한 이용하고 작품의 구성 방식에 있어서 현장성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1980년 11월 문예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 미술관)에서 창립전인 '제1회 다무그룹전_있는 것과 보이는 것'을 개최했다. 참여작가는 김정식, 김학연, 이흥덕, 임충재, 정진석, 최현수, 홍선웅이다. 다무는 사물과 사물을 '상보적 관계'라고 보고 타자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사물의 실체가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이후 '겨울·대성리' 전시를 통해 실내공간을 벗어나 자연 속에 설치 작업으로 사물의 본질과 미의식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자 다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기존의 사물의 본질을 찾는 작업과 군사정권에 투쟁, 저항의 뜻을 나타내는 민중미술 작품이 동시에 내걸리면서 제3회 그룹전을 끝으로 다무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


연대기

▶창립년도 : 1980년
▶창립멤버 : 김정식, 김학연, 이흥덕, 임충재, 정진석, 최현수, 홍선웅

▶1980.11. 제1회 다무그룹전 있는 것과 보이는 것(창립전)_문예진흥원 미술회관
▶1981.1. 겨울 대성리 31인전_가평군 대성리 북한강변
▶1981.7. 제2회 다무그룹전 있는 것과 보이는 것2_문예진흥원 미술회관
▶1982.3. 전환의 회화전
▶1982.8. 의식의 정직성 : 그 소리전_관훈미술관 및 별관
▶1983.8. 제3회 다무그룹전 있는 것과 보이는 것3_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선언문

사물의 실체를 고정된 범주 속에 넣어 합리적 방법으로 인식하려 했던 것은 이른바 물질과 정신을 대립된 개념으로 파악해 사물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데서 많은 문제를 내포해왔다. 사물은 양극의 대립이나 또는 단순히 그 대립의 중간 상태에서도 아니며 사물의 정체성 내지는 상호관련성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구체적 형상을 갖춘 물질적 대상은 그 자체만으로서 실체라고 규정될 수 없으며, 사물과 사물의 상호작용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실체는 그 개체만으로서 파악될 수 없고 실체와 실체의 상호 관련속에서 통일된 전체로서 인식될 때 드러난다. 또한 실체는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 내에 무수히 생성, 변화, 운동하는 활성적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사물의 상보적 관계 中에서)

 


시대 고발자_다무그룹 홍선웅

 

  "시대정신 저버릴 수 없어 작업으로 문제의식 짚어"

 

▲ 1980년대 초 다무그룹에서 활약했던 홍선웅 작가가 당시 활동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 1980년대 초 다무그룹에서 활약했던 홍선웅 작가가 당시 활동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

 

"비극의 현대사가 눈앞에서 펼쳐지는데 작가들이라고 가만히 작품 활동만 할 수 있나요? 그 시절 시대정신을, 아픔을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한강 줄기를 가운데 두고 좌측엔 강화가 우측엔 북한 백마산이 내려다보이는 화실에서 6일 홍선웅 작가는 말했다.

그는 손을 뻗으면 금방 닿기라도 할 듯, 북녘땅이 보이는 곳에 마련된 화실에서 한결같이 평화를 염원한다.
홍 작가는 이전처럼 날카롭고 거친 투쟁의 작업은 아니지만, 여전히 민중미술의 상징과 표상과도 같은 판화 작업으로 대중들을 만나오고 있다.

"주로 조형미술 작업을 해오다 민주화 항쟁을 기점으로 지금은 이곳 김포에 살면서 판화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전시인 '광장' 전시를 통해 생존 작가로는 유일하게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지요."

홍 작가는 80년대 당시, 모노크롬적 선대 작가들에 반기를 들며 사물의 상보적 관계를 주창한 소집단 다무그룹의 주축 멤버였다.

다무그룹은 80년대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전투적이고 저항적인 소집단들과는 다른 색깔을 보인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다무그룹의 처음과 끝이 확연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70년대 무목적성, 탈이미지적 미술의 흐름을 비판하고 사물과 사물이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에 대한 전제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했었죠. 그러나 광주 사태가 터지고 난 뒤 작가로서 시대정신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상황과 인식' 작품처럼 저항과 억압을 표출하는 거친 작업을 통해 문제의식을 짚어내고자 했죠."

실제 다무그룹의 전시 풍경도 광주 민주화 운동 전후로 확연히 달라졌다. '제1회 다무그룹 : 있는 것과 보이는 것' 전시와 '겨울 대성리 31인전'에서는 각각 70년대 미술사를 비판하고 평면 매체의 다양성을 보여주려는 실험적 작품과 자연과의 조합을 통해 예술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작품들이 주로 소개됐다. 그러나 1983년 제3회 다무그룹전에서는 기존의 이념대로 창작된 작품과 역사적 문제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한 전시장에 나란히 등장했다. 이같은 작가들의 작품관 대립은 다무그룹의 해체로 이어졌다.

"두 가지 이념의 작품이 한 전시장 안에 묶여있을 수는 없었죠. 서로 뜻이 달라 3회 전시를 끝으로 다무그룹은 각자의 길로 갈라섰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한 달의 한 번씩은 멤버들이 만남을 갖고 작품에 대한 견해를 나누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무그룹 해체 이후에도 홍 작가가 가지고 있던 민주화에 대한 가치관과 민중미술을 하고자 했던 열망들은 멈추지 않았다.

1983년부터는 민중미술협의회(민미협)에 몸담으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홍 작가는 윤범모, 라원식, 유홍준 등과 함께 민미협의 산파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특히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홍 작가는 현재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촉발제 역할을 했던 '민중교육지'의 집필 과정에도 가담하게 된다.

"1985년 당시 미림여고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YMCA 중등교육자협회를 통해 교육 현장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한 민중교육지를 출간했죠. 이후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맥을 같이 하며 교원운동을 벌여왔습니다. 그러나 책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저를 포함한 교사 1500명이 해직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일생일대 사건을 맞이하게 됐죠."

홍 작가와 다무그룹이 가고자 했던 길은 달랐지만 바라던 세상은 같았다. 그들이 피와 땀, 눈물로 얻어낸 오늘이, 시점시점 전시회를 통해 36년 만에 다무그룹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홍 작가는 감격스럽다.

"시점시점 전시회는 80년대의 민중미술사를 총망라한 전시회죠. 그 당시의 시대정신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기도 하고요. 다무가 당시 현장 작업으로 이뤄진 작품이 많다 보니 작품을 직접 보여줄 수 없어 아쉽지만 남아있는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혜림 기자 hama@incheonilbo.com